<공감공간> 서울 성산동 ‘문화비축기지’

1970년대 만들어진 개발시대 산업유산
시민 아이디어 모아 문화생산공간 재탄생
전시 · 공연 · 파빌리온 등 다양하게 구성
월드컵경기장 · 하늘공원도 가까이에

 

지난해 문을 연 문화비축기지는 70년대 산업유산을 활용해 만든 새로운 개념의 문화생산공간이다.


[고양신문] 서울 마포구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주변은 어느 방향으로 가도 새로운 공원과 만나는, 대한민국 최고의 도심공원 집약지다. 월드컵경기장 남서쪽으로는 평화의공원이, 서쪽으로는 억새밭 사이로 해 지는 한강을 조망하기 좋은 하늘공원과 노을공원이 이어진다. 그뿐 아니다. 하늘공원에서 한강으로 내려서면 도심 캠핑족들의 로망 난지한강공원이 자리하고 있고, 인적 드문 한가로운 산책코스를 찾는 이들에게는 난지천공원이 제격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핫플레이스가 더해졌다. 월드컵경기장 북서쪽은 작은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매봉산 아래 지난해 10월 문을 연 ‘문화비축기지’가 그곳이다.

문화비축기지를 고양신문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첫 번째 이유는 고양에서 무척 가깝기 때문이다. 경의중앙선을 이용하면 행신역에서 네 정거장만에 닿는 디지털미디어시티역에서 내리면 된다. 역에서부터 문화비축기지까지 직선거리로 1㎞ 남짓, 느긋하게 걸어도 15분이면 입구에 도착한다. 승용차를 이용하면 더 편하다. 제2자유로 서울방면으로 곧장 달리기만 하면 일산에서 상암동으로 논스톱 배송되기 때문이다. 주말 오후 가벼운 마음으로 훌쩍 다녀오기 좋은 거리다.


석유저장소가 문화저장소로 변신

조금은 생소한, 문화비축기지라는 이름이 붙은 데는 이유가 있다. 사실 이곳은 1970년대 ‘석유파동’을 겪던 시절의 산물이다. 중동정세 불안정과 함께 찾아온 원유가 급등은 막 성장의 기지개를 켜던 대한민국 경제에 엄청난 위협으로 다가왔다. 이에 대비해 정부에서 비상상황에 써먹기 위한 대규모 석유 저장시설을 만든 것이 바로 매봉산 자락 암반 사이에 5개의 초대형 저장탱크를 숨겨놓은 ‘석유비축기지’였다. 1급 보안시설로 분류돼 일반인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비밀공간, 개발시대의 풍경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산업유산인 셈이다.

운명의 전기를 가져온 것은 2002 월드컵이었다. 세계인의 축제를 열어야 하는 경기장 코앞에 초대형 유류탱크를 유지할 순 없었기에, 대회를 앞두고 석유비축기지가 이전하게 된다. 그렇게 10년 넘게 방치되던 시설이 2013년 활용 아이디어 공모를 거쳐 친환경 복합문화 공간으로 변신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로 구성된 자문위원회와 시민 기획단이 머리를 맞대고 공간의 성격을 그려나가 오늘날의 ‘문화비축기지’로 탄생했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로 매진하던 시절 석유를 저장했던 곳이, 삶의 여유와 의미를 찾는 시절을 맞아 문화를 생산하고 향유하는 시설로 탈바꿈한 것이다.
 

문화비축기지 잔디밭에서 피크닉을 즐기는 가족들.


오랜 이야기가 고여 있는 T5

문화비축기지를 차례대로 둘러보자. 5개의 기름탱크가 있던 자리는 고스란히 T1부터 T5까지 특색있는 문화공간이 됐다. 여기에 탱크를 해체하며 모은 자재를 재활용해 만든 커뮤니티센터인 T6가 추가됐다. T1부터 둘러봐도 좋지만 기자는 T5부터 역순으로 코스를 택했다. ‘이야기관’이라 이름 붙은 T5는 7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석유비축기지가 문화비축기지로 변신한 흔적과 역사를 한눈에 살필 수 있도록 꾸며놓았기 때문이다. 탱크 외벽으로 따라 원형으로 이어진 전시공간을 구성한 키워드는 ‘관계성’과 ‘장소성’이다. 이곳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의 흔적과 구술 등을 천천히 만나다 보면 거대한 철판과 콘크리트 덩어리로 구성된 무미건조한 구조물 역시 부드럽고 따뜻한 의미를 지니는 ‘인간의 공간’이었음을 알게 된다.

탱크 내부를 영상실로 꾸민 T5는 구조적으로도 가장 완결적이다. 외부와 내부가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탱크의 안과 밖, 그리고 바위산을 절개한 옹벽과 드러난 암반까지 고스란히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석유비축창고에서 문화비축창고까지, 공간이 품은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는 T5 전시공간.


문화공간 T4, 원형보전 T3

T4로 걸음을 옮기면 15m 높이의 탱크 내부를 그대로 살린 복합문화공간이 나온다. 안내책자에 실린 건물 설계자 허서구 건축가의 이야기를 살펴보니 “T4는 탱크 자체를 보강하거나 구조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절대 원칙을 지켰다”고 말한다. 그런 까닭에 전시장으로 설계됐음에도 내부 조명이 없다. 건축가는 “어둡고 텅 빈 탱크 안으로 가느다란 빛줄기가 뚫고 들어온다. 기다란 파이프 기둥이 그 빛을 반사한다. 공간은 스스로를 전시한다”고 적고 있다. 이어 “이 공간의 무게를 감당할 수 았는 역량 있는 작가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복합문화공간은 전시와 퍼포먼스, 워크숍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 가능하다고 한다.
 

복합문화공간으로 사용되는 T4.


T3는 가장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기대감을 품고 잔디언덕 사이로 난 멋진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덜커덩, 철문이 나타난다. 자물쇠는 굳게 채워져 있지만 철제울타리 사이로 웅장한 석유비축탱크가 위용을 드러낸다. 5개의 탱크 중 원형을 그대로 남겨 놓은 한 곳이 바로 T3다. 높이 15m에 이르는 거대한 철제 탱크가 육중한 콘크리트 옹벽과 단단한 바위산 사이에 박혀있다.

탱크는 사선으로 이어진 철계단과 함께 붉은 얼룩을 안고 녹슬어가고 있다. 인간이 만든 인공물이 시간과 함께 녹슬고 풍화되어 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안내책자에는 ‘미래를 위한 유보의 공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손대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 많은 상상력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문화비축기지라는 이름에 가장 걸맞는 포인트가 아닐까.
 

한 무리의 나들이꾼들이 T3 입구로 들어서고 있다.
석유저장탱크 원형을 그대로 보존한 T3. 세월 속에서 녹슬어가며 독특한 매력을 풍긴다.

 
하늘 바라볼 수 있는 T2, T1

세 곳을 숨가쁘게 둘러봤으니 T2에선 잠시 쉬어가도록 하자. 이곳은 하늘이 뻥 뚫린 야외 공연장이다. 무대와 객석이 여느 야외공연장과는 달리 무척 개성있다. 마치 블록을 여기저기 늘어놓은 것처럼, 매끈한 콘크리트로 좌석을 만들어놓았다. 관객들이 매봉산을 등지고 앉아 전면을 바라보면 탱크를 감쌌던 콘크리트 옹벽이 무대 배경을 갈무리하도록 설계했다.
객석에 앉아 가방에서 음료수를 꺼내 마시며 사방을 음미한다. 매봉산을 뒤덮은 신록, 공연장을 넘나드는 바람…. 어디까지가 자연이고, 어디까지가 인공인지 경계가 모호해지는 착각이 든다.
 

독특한 디자인의 T2 야외공연장. 잠시 쉬어가기에도 좋다.


문화비축기지 가장 서쪽에 자리한 T1은 석유비축기지 시절 휘발유를 보관했던, 탱크 5형제 중 가장 작은 탱크였단다. 지금은 벽과 지붕이 유리로 뒤덮인 화사한 파빌리온으로 변신했다. 유리벽 뒤로 역시 매봉산 절개면의 암벽이 고스란히 보인다. 건축 소재로서 유리가 가진 매력은 날씨의 맛을 가장 잘 전달한다는 것. 비 오는 날, 또는 달빛 밝은 밤이면 보다 특별한 낭만을 선사해줄 듯하다.
콘크리트, 철판, 유리, 그리고 암벽…. 문화비축기지의 모든 구조물은 하나같이 건축 자재의 물성을 날것 그대로 적용해 물질 자체가 주는 미묘한 감각의 차이를 순서대로 경험하게 해 준다.

다섯 개의 탱크 아래쪽에 자리한 T6는 앞서 말했듯, 해체된 탱크 재료를 재활용해 새롭게 창조해낸 공간이다. 1층에는 멋진 카페테리아가 손님을 맞고 있고, 3층까지 길고 넓게 이어진 경사로는 그 자체로 전시와 아카이빙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긴 복도를 지나면 나타나는 T1 파빌리온. 유리로 지어져 채광이 멋지다.
T6 1층 카페테리아.

 
전망 멋진 매봉산 산책로

여섯 개의 바둑돌을 선으로 잇는 것 같은 문화비축기지 나들이를 마쳤다면, 기지 서쪽으로 난 나무데크를 따라 매봉산 산책길로 진입해보자. 매봉산은 일산 정발산과 비슷한 높이의 나지막한 산이다. 상암동과 성산동이 상전벽해를 만나기 전부터 이웃 주민들이 산책로로 이용했던 마을 뒷산이다. 덕분에 주민들은 석유비축기지의 존재를 훤히 알고 있었다고 한다. 산 중턱에 서면 다섯 개의 거대한 탱크가 잘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능선을 따라 산책로가 잘 정비돼 있다. 산책로 중간의 전망대에 서면 ‘매봉산 포토 랜드’라는 이름을 단 안내판이 나들이꾼을 맞는다. 발 아래 문화비축기지에서부터 서울월드컵경기장, 평화공원, 하늘공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너머로 63빌딩과 국회의사당이 서 있는 여의도 풍경이 보이고, 멀리는 남산과 청계산, 관악산, 삼성산과 서울을 가로지르는 한강 줄기가 배경을 이루고 있다. 도시락이나 간식거리를 준비해왔다면 전망대 근처의 벤치나 피크닉 테이블에 자리를 잡으면 된다.
 

매봉산 산책길 전망대에서 바라본 전경. 아래쪽이 T3, 중간이 T6, 그 너머 월드컵경기장과 평화의공원이 보인다.
전망대에서 풍경을 감상하고 있는 나들이꾼들.


아기자기한 쉼터 평화의 공원

매봉산에서 가벼운 산행 기분을 내고 월드컵터널 위를 건너면 바로 월드컵경기장으로 이어진다. 경기장을 한 바퀴 돌아봐도 좋고, 남쪽으로 바로 가로질러 평화의공원을 찾아가도 좋다.

평화의공원은 주말과 휴일이면 많은 이들이 찾는 피크닉 명소다. 햇살 좋은 봄날을 놓치지 않으려는 이들이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진 호수 주변을 따라 작은 텐트를 빼곡히 쳤다.

고양시민이야 호수공원이 있어 웬만한 인공호수는 눈에 차지 않지만, 평화의공원 호수도 나름의 매력은 충분하다. 경기장을 등진 북쪽은 인공 석축으로, 한강 방향의 남쪽은 흙을 밟을 수 있는 자연형 공원으로 꾸몄다. 가족 단위 나들이꾼들은 주로 북쪽에 자리를 잡지만, 아기자기한 산책을 즐기기에는 남쪽이 제격이다. 소박한 개울, 수변 관찰로, 그리고 크고 작은 전시물들이 구석구석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수종도 제법 다양하고 꽃도 여러 종류가 피어 방문자를 반긴다. 공원의 동·서 입구쪽에는 피크닉 테이블을 갖춘 매점이 있어 간단한 먹을거리를 즐기며 쉴 수 있다.

평화의공원까지 둘러보았으면 이제 결정해야 한다. 내친김에 길 건너 지그재그 계단을 올라가 하늘공원의 풍차를 만나러 갈까? 아니면 메타세쿼이아 숲길을 지나 난지한강공원으로 가볼까? 미련을 뒤로 하고 오늘 나들이는 여기까지만. 새로운 감성을 충전시켜 준 문화비축기지의 참신한 여운을 좀 더 누리고 싶기 때문이다.
 

평화의공원 개울에서 물놀이하는 아이들.
난지한강공원으로 연결되는 메타세쿼이아 숲길.

 
문화비축기지

서울 마포구 증산로 87
02-376-8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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