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 3.1운동 100주년 특집 ‘고통을 승화시킨 숭고한 저항의 역사’ (4)

<연재 순서>
(1) 연재를 시작하며 - 100년 전 고양은 어떤 곳이었을까
(2) 일제에 저항한 고양 사람들 - 국채보상운동과 의병운동
(3) 고양의 3·1운동(상) - 육로·수로·철로를 타고 퍼진 독립의 열망
(4) 고양의 3·1운동(하) - 산 위에서도 배 위에서도 울려 퍼진 만세 소리
(5) 고양의 독립운동가(상) - 만세시위에서 농촌운동까지, 양곡 이가순
(6) 고양의 독립운동가(하) - 기미독립선언의 구텐베르크, 동암 장효근
(7) 고양 독립운동의 가치와 계승 - 아직 못다 이룬 대한독립 만세의 꿈

 

독립만세 열망을 실어 나른 각종 격문
‘만세운동 동참할 것’ 준엄히 권고

행주나루 배 위에서, 벽제 산 위에서…
일산 장터에서도 자주독립 만세 함성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급격히 위축
임시정부와 독립군 결성의 출발점

 

3.1운동의 대의와 목적을 명쾌히 밝힌 '독립선언서'.


[고양신문] 지난주에 이어 고양에서 전개된 3·1만세운동의 구체적 사례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의 열기가 고양땅까지 전해진 양상을 다시 한 번 짚어보자. 파고다공원에서 사대문 안으로, 다시 서울을 둘러싼 외곽지역을 거쳐 고양군과 같은 농촌마을까지 동심원처럼 퍼져 나가는 과정에서 참가자들의 신분 역시 단계적으로 대중화된다. 처음에는 민족대표와 학생들이 중심에 섰고, 점차 경성이라는 식민지 수도 주변에서 살아가는 상인과 노동자, 마차꾼과 잡부들까지 만세 대열에 참여한다. 그리고 고양군에 이르면 사회생산구조의 토대를 떠받치는 농민들이 주축이 된다.   

선언서와 각종 격문 큰 역할

이 과정에서 만세운동의 대의명분을 명쾌히 밝힌 ‘3·1 독립선언서’ 인쇄본과 대중의 동참을 촉구하는 각종 ‘격문’이 큰 역할을 했다. 당시 만세운동의 뜨거운 정서를 전파하는 가장 강력한 매체는 사람과 사람을 타고 전해지는 입소문이었다. 그러나 그 뜨거운 정서를 결집하고, 성격과 방향성을 제시하는 역할은 비밀리에 확산된 다양한 문서들의 몫이었다. 

고양지역에 전해진 몇몇 사례를 살펴보자. 신도면 구파발리 이원명이라는 사람에게 조선독립신문사 기자 명의로 전달된 격문을 보면 ‘생사의 관문을 아느냐, 동포여?’ 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일제에 의한 조선민족박멸의 위협, 언론·신앙·출판·출입이 통제당하는 치욕과 고통’ 등의 내용을 열거하며 민족자결의 의지를 일깨우고 있다.

또한 송포면 덕이리에서 발견된 격문은 ‘독립만세 아니 부르면 주의하시오’라고 경고한 후 ‘송포면민이여, 우리 민족들이 일치단결하여 오늘 일산장에 독립만세 부르러 가세’라며 구체적인 거사 일정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민족의식 구심점 된 교회와 성당

송포면장에게 전달된 ‘경통(警通, 경고를 담은 통지)’도 무척 흥미롭다. 만세운동에 참여하길 주저하는 송포면장에게 ‘2천만 동포가 독립을 위해 경성 내 대개의 학생과 천주교인, 노동자까지 다 만세를 부른다’는 사실을 주지시킨 후 ‘만세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고양군 송포면장은 어서 뜻을 함께 하라’고 준엄하게 경고하고 있다.

눈에 띄는 점은 발신자를 ‘행주성당 천주교인’이라고 당당히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당시 ‘행주성당 교인’이라는 이름이 나름대로 조직력과 영향력을 입증하는 명칭이었던 것 같다. 1899년 행주공소로 출발해 1909년 본당으로 승격한 행주성당은 당시 고양군은 물론 파주와 연천, 김포까지가 다 관할교구였고, 외국인 선교사들이 자주 드나드는 주요 거점이었다. 물론 외국인 선교사들이 교구운영을 주도한 가톨릭교회는 공식적으로 조선의 독립운동을 금하거나, 방관자적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교리를 공부하며 일찌감치 평등과 인권 등의 가치에 눈을 뜬 교인들은 비공식적으로 만세운동과 민족해방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행주성당이 펴낸 『행주성당 100년 이야기』에는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천주교인임을 당당히 밝히고 면장에게 시위 참여를 요구한 ‘경통’의 존재는 당시 행주성당 교우들의 적극적 독립의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기록돼 있다.

행주성당뿐 아니다. 행주리와 토당리에는 이미 행주교회, 사산교회(능곡교회) 등 여러 교회들이 활발히 교세를 확장하며 종교활동과 교육활동을 병행하며 지역의 거점 역할을 했다. 특히 행주성당은 신양학교, 능곡교회는 보명학교라는 부설 교육기관을 운영하며 주민들에게 교리공부와 신학문을 함께 가르치고 있었다. 행주지역에서 고양에서 가장 큰 규모의 만세운동이 지속적으로 펼쳐진 배경에 이들 성당과 교회의 역할도 적지 않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고양에서 발견된 격문 중에는 '행주성당 천주교인'이름으로 송포면장에게 보낸 '경통'이 있다. 3.1운동 당시 행주성당 교인들의 적극적 참여를 증명해준다.

 
전국 유일의 선상시위 펼친 행주나루

행주지역 만세운동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살펴보자. 3월 11일 처음 만세의 함성이 울려퍼진 행주지역에서는 이후에도 15일과 24일, 28일 등 여러 차례 만세운동이 반복됐고, 참여인원도 많게는 8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대대적이었다.

잘 알려진 대로 행주에는 한강 하구의 가장 큰 나루터가 있어 한강 수운을 이용하는 수많은 사람과 물자가 드나들었다. 그런 까닭에 타 지역에서 모여든 인파들도 많이 가세했지만, 만세시위를 주도한 이들은 역시 지역의 토박이들이었다. 우선 한강변에 우뚝 솟은 덕양산에 올라 권율장군과 행주대첩의 민족혼을 상기하며 만세를 불렀다. 또한 한밤중에 횃불을 치켜들고 밤샘시위를 했다는 기록도 발견된다.

무엇보다도 행주나루 만세시위의 가장 특기할 만한 점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배를 타고 강물 위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는 점이다. 
3·1운동 비사를 모은 자료를 보면 행주지역의 주민과 나루터에 모인 사람들이 일제 경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배를 타고 강 한가운데로 나가 선상에서 만세운동을 이어갔다고 밝히고 있다. 어민과 뱃사공들이 목숨을 걸고 만세꾼들을 강 위로 피신시킨 것이다.

이들은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왜경들을 향해 “옛날 임진년에 이곳에서 너희 조상들이 권율장군에게 망했으니 만일 쫓아오면 네놈들도 그와 똑같이 망하리라”라고 외쳤다고 한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이러한 일화는 역사와 민족의식을 계승한 지역이라는 행주지역 주민들의 자부심을 잘 보여준다.
행주나루 선상만세운동의 역사적 가치에 주목한 민족문제연구소 고양파주지부는 몇 해 전부터 매년 3월 선상만세운동을 재연하는 기념행사를 행주산성역사공원과 한강에서 열고 있다. 

행주나루는 선상만세운동 이전에도 고양의 독립운동사와 관련해 꼭 기억해야 할 장면이 펼쳐진 장소이기도 하다. 도산 안창호와 단재 신채호, 김지간, 정영도 등이 1910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떠나가기 위해 작은 목선에 몸을 실은 곳이 바로 행주나루였다. 안창호는 망해가는 나라의 운명을 뒤로 하고 후일을 기약하며 떠나가는 심경을 ‘거국가(去國歌, 조국을 떠나가며 지은 노래)’라는 시로 남겼다. 행주나루터가 있던 한강변에는 현재 행주산성역사공원이 조성돼 시민들의 휴식처가 됐고, 선상만세운동의 기록을 담은 안내판과 도산의 ‘거국가’를 새겨 넣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고양파주지부는 매년 3월 행주산성 역사공원 앞 수변에서 행주나루 선상시위 재연행사를 열고 있다. <사진제공=민족문제연구소 고양파주지부>

 
산위에서 횃불 밝힌 벽제지역 만세운동

이번에는 벽제지역 만세운동을 살펴보자. 이곳의 특징은 마을 뒷산에 올라가 산상만세를 펼쳤다는 점이다. 일제의 사건 기록에 ‘3월 26일 벽제면 대자리 응봉산(대자산)에 수십 명의 주민들이 올라가 불을 피우고 다음날까지 만세를 불렀다’는 대목이 등장하고, 이어 ‘3월 27일에는 벽제면 관산리 가장곡산에서 주민 30여 명이 밤을 새며 만세를 불렀다’고 적고 있다. 아마도 이웃한 두 동네가 연계해 준비한 것이 아닌가 싶다.

만세를 왜 산 위에 올라가 불렀을까. 여러 가지 이유를 추측할 수 있다. 우선 장터나 포구처럼 많은 외부 인원이 모이기 어려운 자연부락에서 소수의 주민들이 일본 군경을 피해 기습적 만세운동을 펼치기에는 마을 뒷산이 최적지였을 것이다. 또한 한밤중 산마루에서 타오르는 횃불을 모든 마을사람들이 바라보며 독립의 열망을 새겼으리라.   

기록을 살펴보면 산마루에 올라가 만세를 부른 ‘산상만세’가 은평면과 고양군 등 서울 북부 에서 연이어 전개된 것을 알 수 있다. 은평면 신사리 월암산 시위를 시작으로 역촌리 당재, 진관외리 뒷산, 그리고 고양지역으로 넘어와 행주동 덕양산과 함께 벽제지역의 대자산과 가장곡산으로 산상시위가 이어졌고, 한밤의 횃불시위, 철야시위의 형태로 전개됐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록은 조선시대의 핵심 방어용 통신수단이었던 봉화의 점조직을 연상케 한다.

가장곡산은 지금의 통일로 변 가장동 삼거리 뒷산으로 추정한다. 또한 응봉산으로도 표기된 대자산은 고양향교가 자리하고 있는 지금의 고양동 뒷산이 유력하다. 하지만 정확한 위치에 대한 연구는 아직 부족한 실정이다. 행주나루 선상만세처럼 벽제지역 산상만세 역시 고양의 자랑스러운 만세 운동으로 새롭게 조명하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벽제지역은 산상만세시위가 연이어 열렸다. 사진은 관산동 가장곡산의 모습.

 
일산장날을 뒤덮은 만세함성

특집기사 첫 회에 행주나루, 의주로, 경의선 등 100년 전 고양으로 열린 3개의 길을 짚어본 바 있다. 이 길들과 연결되는 행주지역과 벽제지역에 이어 경의선의 고양시 거점인 중면 일산리에서도 역시 큰 규모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일산지역은 만세운동을 펼치기에 장점과 단점을 함께 지닌 곳이었다. 5일에 한 번 장이 열리는 덕분에 거사 일정을 잡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에 좋았지만, 수색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일본 헌병부대가 출동하기에도 용이했다. 그래서인지 어느 지역보다 격렬한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장날 전날인 3월 25일 160여 명이 시위를 시작했는데, 중면 면장이 강경한 태도로 만세시위에 참가하지 말 것을 강요하며 헌병 주재소에 주민들의 동향을 보고했다.

하지만 그 일이 오히려 기폭제가 돼 장날인 26일에는 500명이 넘는 대규모 시위대가 장터와 면사무소 앞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뜨겁게 외쳤다. 이들은 헌병대의 강력한 진압에 굴하지 않고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인근 일본인 가옥에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만세운동은 3일째 되는 날까지 이어져 150여 명이 늦은 밤까지 횃불을 치켜들고 시위를 지속했다.  

100년 전 시위 함성이 메아리쳤을 중면사무소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몇몇 책에는 지금의 명성운수 차고지 자리였다고 적고 있지만, 지역사를 연구하는 이들은 일산시장 앞 사거리 부근의 현 119지역대가 있는 위치였다고 추측하고 있다.
근대문화재로 지정된 구 일산역사는 현재 일산역전시관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건물 안팎에 일산지역의 3·1만세운동을 알리는 전시물과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일산역은 일제강점기 내내 이어진 무장투쟁 열사들이 이동 경로로 삼은 곳이기도 했다. 만주지역에서 출발해 경의선을 타고 먼 길을 달려 온 이들은 상대적으로 일경의 검문을 피하기 용이한 일산역에 내려 조심스럽게 경성으로 잠입했던 것이다. 대표적 인물로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헌병대와 맞서 치열한 총격전을 전개한 김상옥 열사를 꼽을 수 있다.
 

100년 역사를 가진 일산 5일장 풍경. 100년 전 장날, 일산장터에서 만세함성이 들불처럼 일어났었다.

 
가혹한 진압으로 위축된 지역사회

지난 회에서도 살폈듯 일제는 맨손으로 전개된 3·1만세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검거자들에게 혹독한 구타와 고문을 가했다. 대중들을 경고하는 본보기로 삼기 위해 보다 잔인한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비무장 저항운동을 향한 일본의 무력사용은 표면적으로 ‘문명화’를 표방한 식민지배의 기만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가혹한 진압의 결과일까. 고양지역의 시위는 3월 말로 일단락된다. 일제의 기록은 ‘고양군 일산 지방 소요 발발 이래 검거·처벌한 자가 198명에 미쳤고, 장래에는 망동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쓴 자가 많아 민심이 완전히 복구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복구된 민심’ 이면에는 참혹한 고문과 투옥이 은폐돼 있었다.

당시의 정황을 살필 수 있는, 일제가 남긴 또 하나의 기록을 들여다보자. 4월 19일, 일산리에 있었던 일제 헌병대 고양군 주재소의 한 상등병이 타 지역으로 전근을 가게 되자 일산의 유력자들이 식사를 대접하며 간담을 나누고 싶다는 요청을 한다. 헌병 주재소 측이 이를 받아들여 중면 면장을 비롯한 지역사회 유력자 20명과 일본인 5명이 회식을 연다. 그 자리에서 유력자들이 한 말을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들은 잘못된 행적을 뉘우치고 금후 만약 다른 지방에서 들어와서 민심을 선동하는 등 불령자가 있으면 곧 주재소로 신고할 것은 물론, 동민이 협력해서 이를 체포·인도하겠다고 말하고 여러 가지 간담을 나눈 후 해산했다.’

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일제 헌병 간부도 아닌, 겨우 상등병 하나가 전근 가는 것을 핑계 삼아 일본인들의 비위를 맞추며 만세시위의 잘못을 사과하는 지역 유지들의 비굴한 모습을 확인하는 마음이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만세시위에 대한 탄압과 압박이 얼마나 지독했으면 저렇게 해서라도 누그러뜨리려 했을까. 아마도 만세운동은 실패했고, 산 자는 어떻게든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현실론이 이들의 내면을 합리화했으리라.

시위의 큰 불을 일단락 한(일제의 입장에서 보자면) 5월에 일제는 전국적으로 춘계 청결검사를 실시한다. 청결검사는 가정과 마을의 위생상태를 점검한다는 명분으로 일제히 실시됐는데, 그 이면에는 마을이나 민가에서 은폐하고 있는 독립운동가나 무기류 보안검사 성격도 강했다. 고양지역의 청결검사와 관련해 일제는 ‘고양군 여러 지역은 소요가 있었던 관계상 평소 열의가 없던 마을도 예년에 비해 성적이 좋았다’고 간략히 기술하고 있다. 위생검사 평가점수가 좋지 못하면 의심을 살 것이라 염려해, 군민들이 알아서 자신들의 사적 공간을 탈탈 털어 보여줬다는 말이 된다. 이 역시 가혹한 탄압의 여파로 한 없이 위축된 지역사회의 슬픈 일면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일산역 전시관 옆에 서 있는 일산지역 만세운동 안내문.

 
자주·민주·인권을 향한 거대한 발자취

그렇다면 3·1만세는 실패로 끝난 운동이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3·1운동의 열망과 좌절을 경험한 이들이 국경 너머 만주와 노령 등으로 건너가 독립군 단체를 형성했고, 기미독립선언문의 정신을 이어받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른다.

3·1운동을 겪은 일제는 강압적 무단통치만으로는 한민족의 저항의지를 억누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형식적으로나마 문화통치로 전환한다. 헌병경찰제를 폐지하고 보통경찰제를 실시한 것이 대표적 예다. 그 결과 우리민족은 교육기회의 확대와 언론·집회·결사 등 장기적 민족문화운동을 전개할 최소한의 여건을 확보하게 됐다. 또한 민족의식과 함께 민권평등사상과 공화주의와 같은 근대적 가치들이 민중들의 내면에 비로소 뿌리를 내린 것도 역시 3·1운동 덕분이다.

나아가 식민지 조선에서 처음 시작된 비무장 민중운동은 중국 5·4운동을 비롯해 인도와 필리핀, 멀리는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제국 열강의 지배를 받는 민족들에게 커다란 자극과 용기를 촉발했다.

단기적으로 철저한 실패로 보이는 사건이 역사의 거대한 흐름의 밑거름이 되는 것을 역사는 반복적으로 증명한다. 선상에서, 산위에서, 그리고 장터에서…. 고양시 곳곳에서 전개된 다양한 3·1만세운동 역시 자주독립과 민주주의, 그리고 해방된 인권을 향한 우리 민족의 숭고한 발자취의 한 몫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다.   
 

■ 도움말 : 이은만(문봉서원장), 이영찬(고양시씨족협회장), 백창환·이철민(민족문제연구소 고양파주지회), 최경순(향토사학자), 정동일(고양시문화재전문위원)
■ 참고자료 : 『고양 독립운동사』(이정은, 광복회고양시지회), 『고양시사』(고양시사편찬위원회), 『능곡교회 120년사』(연규홍, 능곡교회), 『행주성당 100년 이야기』(강종민, 아네스), 『고양의 독립운동 이야기』(정동일, 고양시), ‘행주나루터 선상 만세운동 토론회 자료집’(민족문제연구소 고양파주지회)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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