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기획
독립선언서 인쇄한 숨은 주역… 여성평등·민중참여 강조한 ‘동암 장효근’고양 3.1운동 100주년 특집 ‘고통을 승화시킨 숭고한 저항의 역사’ (6)
  • 유경종 기자
  • 승인 2019.03.15 20:59
  • 호수 1411
  • 댓글 0
<연재 순서>
(1) 연재를 시작하며 - 100년 전 고양은 어떤 곳이었을까
(2) 일제에 저항한 고양 사람들 - 국채보상운동과 의병운동
(3) 고양의 3·1운동(상) - 육로·수로·철로를 타고 퍼진 독립의 열망
(4) 고양의 3·1운동(하) - 산 위에서도 배 위에서도 울려 퍼진 만세 소리
(5) 고양의 독립운동가(상) - 만세시위에서 농촌운동까지, 양곡 이가순

(6) 고양의 독립운동가(하) - 기미독립선언의 구텐베르크, 동암 장효근
(7) 고양 독립운동의 가치와 계승 - 아직 못다 이룬 대한독립 만세의 꿈

 

최장수 한글신문 제작한 언론인
손병희의 33인 민족대표 권유 겸손히 사양

사상 같았던 동지 이종일과
천도교 입문 후 독립운동 전개

독립선언서 비밀리에 인쇄·배포
만년엔 고양 땅에서 계몽운동 펼쳐

 

고양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인 동암 장효근 선생.

 

[고양신문] 어쩌면 이리도 비슷할까. 고양을 대표하는 양대 독립운동가인 양곡 이가순(陽谷 李可順) 선생과 동암 장효근(東菴 張孝根) 선생의 생애를 살피다 보면 상당한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우선 두 분은 1867년생으로 동갑내기다. 또한 당시로서는 두 분 다 장수하셔셔 양곡 선생은 77세가 되던 1943년에, 동암 선생은 80세인 1946년에 영면하신다. 두 분 다 유교적 사고에서 스스로 벗어나 다른 종교를 적극 수용하며 애국의 길을 찾았다는 점도 비슷하다. 지난 주 살펴보았듯 양곡 선생은 개신교 전도사였고, 동암 선생은 천도교의 대표적 지도자였다.

두 분의 생애는 3·1운동에서 극적인 접점을 찍는다. 장효근 선생은 3월 1일 종로 태화관과 탑골공원에서 처음 뿌려진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인쇄한 실무 책임자였고, 이가순 선생은 장효근 선생이 인쇄한 독립선언서를 사전에 전달받아 서울과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함경도 원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두 분은 각자의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1920년대(동암)와 1930년대(양곡)에 각각 고양땅 행주내동과 토당동 삼성당에 정착해 농민운동과 지역사회 계몽운동을 펼치며 만년을 보내셨다.

두 분의 생애는 때로는 불꽃처럼 타올랐다가, 때로는 강물처럼 흐르기를 반복하며 유장하게 전개된다. 비슷하면서도 각기 다른 두 분의 다양한 행적을 살피다 보면 우리는 구한말에서 시작해 일제강점기 전체를 관통하는 독립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의 큰 흐름을 자연스레 감지하게 된다. 두 분의 존재가 참으로 감사하고 귀하지 않을 수 없다. 본격적으로 동암 장효근 선생의 생애를 들여다보자.

개화에 눈을 뜬 유교적 지식인

1867년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난 장효근 선생은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며 전통적 유학 지식인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는 세상 돌아가는 것을 살필 줄 알았고, 스스로 뜻을 세워 실천할 줄 알았던 참된 지식인이었다. 정식으로 신식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선생의 평생 동지이자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묵암 이종일(默菴 李鍾一)은 자신의 비망록에서 장효근 선생에 대해 “동암은 총명하고 영리하며 정주학에 조예가 깊었다. 처음에는 개화를 사악한 것이라 여겼지만, 동·서양 여러 나라의 새 책들을 두루 읽으며 신학설을 깊이 공부한 후 새로운 의지를 갖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또한 “나와 함께 동학에 입문했을 때도 곧바로 교리 연구에 몰두했다”고 회고한다.

이처럼 세상의 참된 이치와 사람의 도리를 부지런히 궁리했기에 동암 선생은 30대에 이르러 마침내 유학적 세계관의 한계에서 벗어나 근대적 개화지식인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계몽 위해 순한글 ‘제국신문’ 창간

조선의 담장이 주저앉고, 세계관이 격변하는 시절을 맞아 장효근 선생이 투신한 분야는 인쇄와 언론이었다. 그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문사’는 각종 인쇄물을 제작하던 출판사였다. 새로운 소식과 개화된 문명을 접하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을 찾아갔던 것이다.

장효근 선생은 이문사에서 일하며 독립신문, 경성신문 등을 유심히 탐독하며 기울어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민중계몽운동이 절실하다는 신념을 마음에 새긴다. 그는 깨달음과 실천이 일치하는 인물이었다. 곧바로 이종일을 비롯한 이문사 동지들과 의기투합해 1898년 순 한글 ‘제국신문’ 창간을 추진한다. ‘제국신문’의 발행인은 연배가 위인 이종일이 맡았지만, 신문의 성격과 방향을 제시한 이는 바로 동암 선생이었다.
“우리가 신문을 만드는 목적은 하층 민중을 계몽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주 독자층을 부녀자층에 두고 여성해방운동을 주도해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20세기가 채 열리기도 전에, 여성과 하층민을 겨냥한 언론의 기치를 세웠다는 사실이 실로 놀랍기만 하다. 이후 ‘제국신문’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봉건적 가치관과의 결별, 신교육과 산업육성을 통한 실력양성론을 설파하며 1910년까지 발행된다. 구한말 최장수 한글신문의 역사를 지켜낸 선구자적 언론인이 바로 동암 장효근 선생이었다.

또한 당시 대개의 개화지식인들이 그러했듯, 장효근 선생 역시 대한협회, 대한자강회, 기호흥학회 등 여러 애국계몽단체에 이름을 올리고, 동분서주하며 다양한 활동을 바쁘게 펼친다. 윤치호가 회장을 맡고 있었던 대한자강회는 국민계몽과 교육사업을 활발히 펼쳤지만, 일제의 고종퇴위에 반발해 시위를 주도하다 강제 해체된 단체다. 동암 선생은 양기탁·지석영·문일평 등 당대의 대표적 개화지식인들과 함께 간사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동암 선생은 ‘대한민보’의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기도 한다. 대한협회 기관지였던 ‘대한민보’는 특히 흥미로운 사설과 삽화 등을 게재하며 친일인사들의 행적을 신랄하게 풍자한 것으로 유명하다.
 

장효근 선생이 이종일 선생과 함께 제작한 '제국신문' 합병 이전까지 가장 오랜 기간 발행된 순한글 신문이다.


독립운동의 사상적 기반 ‘천도교’

동암 선생의 정체성을 규정해주는 가장 중요한 호칭은 바로 ‘천도교인’이다. 1906년 무렵, 장효근 선생은 이종일 선생과 함께 천도교에 입교한다. 동학에 뿌리를 둔 천도교는 당시 손병희에 의해 보다 조직화된 민족종교로서의 면모를 일신하며 교세와 영향력을 날로 확장하고 있었고, 오세창·권동진·이종훈 등의 쟁쟁한 인사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또한 ‘만세보’라는 일간신문을 발행할 정도로 민중계몽활동에도 주력하고 있었다. 경험 많은 언론인 동암 선생 역시 만세보의 창간에 힘을 보탰다. 동암일기를 보면 “모두가 합심하여 민중의 지지를 받는 후회 없는 신문이 되고자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장효근 선생은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인쇄·출판사 ‘보성사’에서 일한다. 이번에도 역시 이종일과 함께였다. 보성사는 향후 3·1만세운동 전개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역사의 무대가 된다.

많은 이들이 기울어가는 나라에 굄돌이라도 밀어 넣어보려 애를 썼지만, 1910년 일제는 조선(대한제국)을 강제 합병하고 만다. 이종일 선생은 당시 동암 선생과 함께 나눈 비통함을 이렇게 기록했다.
“내 집을 찾아온 동암은 억울하게 나라를 빼앗긴 사실에 대해 울분을 토하며 매우 슬퍼했다.”

국권 상실의 비탄과 절망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천도교가 큰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이후 동암 선생은 천도교 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에 더욱 매진하며 천도교 중앙본부의 요직을 두루 맡는다.
 

장효근 선생의 평생 동지이자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 묵암 이종일 선생.

 

천도교 민중시위와 무장투쟁 주장

 

경술국치 직후부터 적극적 독립운동을 모색한 이들은 이 땅에 수없이 많았으며, 동암 선생도 그 중 하나였다. 그는 일찍부터 이종일과 함께 손병희를 찾아가 이렇게 설득했다.
“갑오년 동학운동의 정신을 되살려 우리 천도교가 앞장서 모든 민족이 참여하는 민중시위운동을 일으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단통치는 엄혹했고, 여건은 막연했다. 그럼에도 장효근 선생은 이종일과 함께 독립운동가들의 재정 지원을 위한 군 자금 모금활동을 극비리에 펼쳤다. 또한 보성사 동지들과 함께 ‘천도구국단’이라는 비밀결사조직을 결성해 무장투쟁계획을 준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손병희를 비롯한 유력 인사들은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며 천도구국단의 활동을 지원하지 않았다. 1916년 일기에는 당시 동암 선생의 답답한 심경이 가슴 아프게 적혀있다.
“일제의 압제가 날로 심해져 실로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천도교 동지들과 독립운동의 방향에 관해 의견을 나눴지만, 오세창·권동진 등은 속수무책 말이 없다. 아아, 정녕 운이 다하고 명이 다했단 말인가.”

이후에도 장효근·이종일 선생은 유력 인사들을 찾아가 “앉아만 있으면 되겠는가”라고 촉구하며 천도교가 장차 독립운동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히 펼쳤다. 마침내 천도교는 1918년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이라는 3대 독립운동의 방향을 내부적으로 정립한다. 동암의 일관된 주장이 3·1만세운동 국면에서 천도교가 분연히 동참하게 만든 원동력이 된 것이다. 거대한 저항의 불꽃이 타오를 날을 기다리며, 장효근 선생은 꾸준히 마른 장작을 준비했던 것이다.

비밀리에 독립선언서 2만1000매 인쇄

천도교는 기독교, 불교와 함께 3·1만세운동의 중심에 섰다. 거사일을 이틀 앞둔 1919년 2월 27일 밤 육당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인쇄 조판이 보성사에 전달됐다. 장효근 선생은 문을 걸어 잠그고 40여 명의 직원들과 함께 비밀리에 인쇄기를 돌려 독립선언서 2만1000장을 찍어냈다. 그런데 하필 종로경찰서 소속의 친일 고등계 경사 신철이 주변을 지나다가, 기계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신철은 즉각 내부로 침입해 수상한 인쇄물을 한 장 챙겨들었다. 인쇄물의 내용이 밝혀지는 날에는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이종일 선생이 서둘러 손병희에게 이 사태를 전하자, 손병희는 신철에게 5000원을 쥐어주며 눈 감아 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경사의 월급이 40원 하던 시절, 손병희가 친일경찰의 입막음을 위해 거금을 꺼낸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제작된 ‘독립선언서’는 다음날 아침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 조직을 통해 전국 각지로 배포됐다. 빼앗긴 나라 백성들의 손에서 손으로 전해진 독립선언서는 저마다의 가슴 속에 뜨거운 결기를 안기는 불꽃이었다.

거사를 앞두고 손병희는 장효근 선생에게 천도교 측 인사로 민족대표에 이름을 올리자고 권유했다. 하지만 동암은 스스로 재능과 자질이 부족하다며 손사래를 쳤다.

일제 헌병들은 만세운동이 터진 당일,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에 들이닥쳐 동암 선생을 비롯한 동지들을 체포했다. 장효근 선생은 5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지만 일행 중 가장 먼저 풀려난다. 어찌 된 일일까? 동암 선생 한 명만은 남겨 바깥세상을 지키도록 하려는 천도교 측의 전략적 판단 때문이다. 실제 손병희와 이종일을 비롯한 동지들은 일제의 집요한 심문을 받으면서도 “동암은 이 일과 무관하다”는 주장을 끝까지 관철하며 장효근 선생을 철저히 보호했다.

동지들을 감옥에 남겨두고 나온 동암 선생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철저한 일제의 감시 속에서도 보성사를 굳게 지키고, 헌신적으로 주요 인사들의 옥바라지를 했다. 위기 속에서 조직의 마지막 불씨를 지켜내기에 가장 적당한 인물, 동지들의 선택이 옳았음을 동암 선생은 묵묵히 증명해냈다.
 

동암 선생에 의해 인쇄, 배포된 '기미독립선언서'. 전국으로 퍼져나가 3.1운동의 발화선이 되었다.


천도교 경성대교구장 맡아 여성계몽운동

장효근 선생은 1920년 천도교 경성대교구 교구장에 임명된다. 서울·경기지역을 아우르는 경성대교구는 천도교 중앙본부 다음으로 중요한 교구였기에, 광범위한 천도교인들의 인정이 있어야만 오를 수 있는 자리였다.

동암 선생이 경성대교구장을 역임하며 펼친 일들 중 가장 인상적인 사업은 부인강습소 설치·운영이었다. 여성 계몽은 제국신문 창간 때부터 동암 선생이 줄기차게 강조했던 주제였다.

1921년 1월 말 열린 부인강습소 개강식에는 100여 명의 부인들이 참석했다. 배움의 기쁨을 찾아 모여 든 여성들 앞에서 동암 선생은 감동적인 개회사를 한다.
“수백 년 동안 우리 어머니들의 생활이 어땠습니까? 햇볕도 들지 않는 어두운 방에 갇혀 감옥생활 아닌 감옥생활로 평생을 마치곤 했습니다. 아무 자유 없이 살아오던 부인들께서 이제 밝은 광명 아래 나와 진리의 강담을 듣게 되었습니다.”

부인강습소에서 가르친 과목은 다양했지만, 가장 시급한 것은 조선의 글자인 한글교육이었다. 계몽교육과 민족의식고취의 바탕이었기 때문이다. 장효근 선생이 경성대교구에서 시작한 부인강습소의 영향으로 지방 각 지회에서도 유사한 사업이 확산됐다.

제2의 3·1운동 ‘자주독립선언서’ 준비

“여러 국가들이 모여 워싱턴에서 태평양군축회의를 연다 하오. 이 시기에 발맞춰 제 2의 독립운동을 계획해야 하지 않겠소?”
옥중의 이종일 선생이 면회를 온 동암 선생에게 건넨 이야기다. 그렇잖아도 동암은 천도교가 중심이 돼 제2의 만세운동을 펼쳐야 한다는 계획을 암중모색하고 있었다. 이종일이 출옥하자 비로소 계획은 급물살을 탄다. 두 사람은 3·1운동 3주기인 1922년 3월 1일에 제2의 만세운동을 열기로 하고, 대의를 천명한 ‘자주독립선언문’을 작성한다.

‘자주독립선언문’ 서두에는 대한이 당당한 자주독립국이며, 평화를 애호하는 세계 으뜸 국민임을 강조한다. 이어 기미년 3월 1일의 감격을 재현하기 위해 보성사 직원들이 앞장서니, 민중들도 희망을 잃지 말고 만세운동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또한 일제가 소위 유화정책을 쓰고 있지만 기만당해서는 안되며 오직 자주독립으로 민중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밝혔다.

안타깝게도 제2의 만세운동은 거사 이틀 전 발각돼 무산되고 만다. 이후 천도교는 보수세력과 혁신세력이 대립하며 내부 갈등을 심하게 앓는다. 낙담을 한 장효근 선생은 오랫동안 헌신했던 천도교의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스스로 일선에서 물러난다. 그리고는 덕수 장씨 일족이 조상 대대로 세거지를 이루며 살아온 땅, 고양군 지도면 행주내리로 이주한다. 1924년, 선생의 나이 55세 되던 해의 일이다.

고향땅 행주내리에서 보낸 만년

장효근 선생의 행주내리 이주는 은퇴자의 낙향이 아니었다. 식민지배가 장기화되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중들의 계몽을 통해 밑바닥부터 저력을 회복하려는 독립운동의 연장선이었다. 학교 설립에 힘을 보태고, 자신의 거처에서 후배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일제의 수탈로부터 농민들의 권익을 지키는 일에도 앞장섰다. 3·1운동을 주도한 천도교 큰어른의 존재는 행주마을의 든든한 거목이었다. 1931년에는 ‘충장공 권율장군 기공사수리기성회’를 조직해 행주산성 권율 장군 사당을 다시 세우는 일을 주도했다. 임진왜란에서 왜적을 물리친 권율 장군의 업적을 기림으로 지역민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함이었다.

마침내 조국 광복의 기쁨을 누린 다음 해, 동암 선생은 누구보다 치열했던 생애를 후회 없이 마감하고 행주내리 선영에 안장된다.

‘장효근 일기’와 생가터 ‘소중한 유산’

기록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선구적 지식인답게, 장효근 선생은 평생토록 꾸준히 쓴 『장효근 일기』 27권을 남겼다. 선생이 만년을 보낸 생가는 한국전쟁을 겪으며 전소되고 말았지만, 다행히 『장효근 일기』는 무사할 수 있었다. 유족들이 황급히 피난을 가는 와중에도 동암 선생의 일기만큼은 땅속 깊이 파묻어두었기 때문이다. 1916년부터 1945년까지 거의 매일 한문체로 기록한 『장효근 일기』는 독립기념관의 유물로 전시되다 올해 5월 등록문화재 714호롤 정식 등록됐다. 동암 선생의 행적도 뒤늦게 조명을 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고, 묘소 역시 2003년 국립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됐다.
 

올해 5월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받은 『장효근 일기』.


고양에서 선생을 기리는 사업 역시 최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본격화됐다. 동암 선생의 장손자 장세왕씨를 비롯한 장후손들의 도움으로 홍선표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원이 선생의 생애를 정리한 책 『동암 장효근의 삶과 민족운동』이 2010년에 발표됐다. 또한 고양시씨족협의회(회장 이영찬)는 올해 제12회 자랑스러운 고양인으로 동암 장효근 선생을 선정하고, 학술발표회를 진행하며 선생의 업적을 기렸다.

행주산성 주차장에서 행주내동 먹거리촌으로 이어진 마을길을 따라 내려와 다시 숲으로 향하는 작은 길로 들어서면 덕양산 기슭에 동암 장효근 선생이 만년을 보내신 생가터가 남아있다. 당시 건물은 6·25때 불타 없어지고, 훗날 다시 지은 집 역시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쇠락해가고 있다. 향토역사학자 최경순 선생은 “장효근 선생 생가를 외적을 물리친 행주산성과 연계해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위한 산교육의 장으로 만들었으면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장효근 선생의 위대한 생애를 기리는 공간이 하루 빨리 고양에 만들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어디 그뿐이겠는가.
 

■ 도움말 : 장한진(덕수장씨 행주종친회장), 이영찬(고양시씨족협회장), 최경순(향토사학자)
■ 참고자료 : 『동암 장효근의 삶과 민족운동』(홍선표, 선인), ‘동암 장효근의 독립운동’(홍선표, 고양시씨족협의회), 『고양시사』(고양시사편찬위원회), 『자랑스런 고양 100인선』(이은만, 고양신문)

 

동암 선생의 생애와 사상은 홍선표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원에 의해 책과 자료집으로 정리됐다.

 

동암 선생은 30여 년 동안 거의 매일같이 한문체로 기록한 『장효근 일기』.를 남겼다.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에 자리한 동암 장효근 선생의 생가터.

 

유경종 기자  duney789@naver.com

▶ 디지털 뉴스콘텐츠 이용규칙 보기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경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