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대 발행인 이은만 원장

주간고양 인수 ‘고양신문’으로 제호 변경
원당역 유치하고 밤가시초가 지켜내고
고양의 전통·정체성 지킴이 ‘외길 인생’

 


1990년부터 발행인을 맡았다.

젊은 청년(초대 발행인 나진택 목사)이 열정적으로 지역신문을 만드는 모습을 보고 사재를 털어 지역신문에 투자하기로 결심했다. 당시만 해도 사업도 하며 한창 활발히 활동하던 때였으니까 두려울 게 없었다. 11호부터 주간고양 사장으로 이름을 올렸고, 1991년 6월 ‘고양신문’으로 제호를 바꿨다.
 

▶초기에 가장 역점을 둔 일은.

신도시 개발의 광풍을 맞아 고양의 전통적 삶의 흔적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시절이었다. 정신적으로 고양의 정체성을 찾아 기록하고, 물리적으로 고양의 문화를 발굴하고 보존하는 일에 고양신문의 역량을 집중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을 추진했나.

고양신문 부설 향토문화연구소를 설립해 지역의 역사와 전통을 발굴하고 기록했다. 당시 정후수 교수(현 한성대 명예교수)가 소장을 맡았고, 역사학도였던 정동일 청년(현 고양시 문화재전문위원)이 상임연구원으로 일하며 고양시 곳곳을 두 발로 누비고 다녔다. 덕분에 수많은 문화재의 숨은 가치를 찾아냈고, 다양한 민속 생활사를 채록한 기사가 고양신문 지면을 통해 연이어 발표되곤 했다. 정발산도당굿을 되살려내고, 권위 있는 역사학자들을 초청해 행주대첩 400년 기념 학술대회를 주최한 것도 고양신문이었다.

 

▶1990년부터 고양예술제도 개최했다.

문화의 불모지였던 고양에서 처음 열린 종합예술 경연대회였다. 지금처럼 훌륭한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았던 시절이지만, 고양군 곳곳을 무대 삼아 음악콩쿨과 사생대회, 미술작품 전시와 수준 높은 공연 등을 소개해 커다란 호응을 얻었다. 당시 최고 성악가였던 테너 박인수, 한국 판토마임의 선구자 유진규 등의 뜨거웠던 무대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밖에도 분과별 예총협회를 설립하는데 힘을 보탰고, 고양어머니합창단을 창단하기도 했다.

 

▶지역언론의 역할을 실감한 사건이 있었다면.

일산신도시 발표와 함께 지하철 3호선 일산선 연장이 발표됐는데, 노선계획을 보니 고양군의 중심지였던 원당을 건너뛰는 게 아닌가. 도시개발의 혜택이 신도시 주민들에게만 돌아가서는안 된다는 생각에 곧바로 원당역 유치위를 결성해 노선 변경 운동에 돌입했다. 5개월간의 치열한 격론 끝에 원당역 유치라는 쾌거를 얻어냈다. 당시 고양신문의 펜은 말 그대로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일산 밤가시초가를 지켜낸 얘기도 들려 달라.

수백년간 전통의 삶을 유지하던 농촌마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과정에서 중부지방 서민가옥의 전형적 구조를 품고 있는 밤가시초가 하나만은 꼭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번 사라지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 문화재를 포기할 순 없어서 집 주인 이경상씨와 함께 초가집을 지켜냈다. 현재 경기도 민속자료로 지정돼 홀로 과거의 흔적을 증언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뿌듯하다.

 

▶고양가와지볍씨 발굴에 기여했다는데.

신도시 개발에 앞서 진행된 1차 문화재 지표조사를 짧은 시간에 끝내려는 것을 보고 화가 났다. 당시 조사 보고서에 ‘오래된 토탄층이 나와 정밀조사가 필요하다’는 문장 한 줄을 빌미로 당국에 2차 조사를 강력히 요구했다. 조사기간이 2달 밖에 주어지지 않은 열악한 조건에서 조사를 담당한 이융조 교수팀이 토탄층을 집중적으로 살펴 오래된 볍씨를 발견했다. 이후 정밀조사와 학술연구를 통해 5000년 전 한반도 최초의 재배볍씨로 밝혀졌다. 정말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고양신문의 역할을 평가한다면.

고양의 지난 30년은 과거의 흔적 위에 새로운 도시를 만든 격동의 시기였다. 그나마 고양신문이 없었다면 역사와 문화의 단절은 더욱 심각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우리가 뿌리 내리고 살아가는 고장의 역사와 전통을 지키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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