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장애인자립생활센터 체험홈 거주인들의 삶, 그리고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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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립생활 체험과 도전에 나선
김쌤·김미화 부부와 정근영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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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에게 좋은 시설이란 없다
‘시설’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밥하고 요리 배우고 저축 하며
‘평범한’ 삶 사는 행복 누려요“
[고양신문] 한번 상상을 해보자.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변두리나 두메산골에서, 매일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잠들며, 짜장면이나 짬뽕 중 뭘 먹어야할지 같은 복잡한(?) 고민은 할 필요 없이, 매일매일 정해진 메뉴대로 편하게(!?) 세끼를 먹으면서, 당신이 스스로 무엇인가를 찾아서 할 필요가 없이 자신들이 알려주는 대로만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보호를 받으며, 집단시설에서 평생 동안 살아가야 한다면?
위와 같은 삶이 좋다며 선뜻 선택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좋은 시설이란 없다’며 탈 시설 활동가들이 ‘자유로운 삶, 시설 밖으로’를 주장하는 이유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잊을 만하면 터지는 장애인 입소자들에 대한 인권 유린 이야기는 어제오늘의 이야기도 아니다. 여전히 적지 않은 수의 장애인들이 격리된 시설에서 지내며 비장애인들은 마치 공기나 물처럼 당연하게 여기곤 하는 ‘평범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장애 비장애 함께 사는 사회로
매년 4월 20일은 국민의 장애인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고, 장애인의 재활 의욕을 높이기 위해 제정된 장애인의 날이다. 우리 사회는 장애와 비장애 구분 없이 함께 살기 위해 얼마나 준비돼 있고 또 그 방법은 무엇일까. 장애인의 날이 있던 4월 지적장애인인 김쌤·김미화 부부와 정근영씨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지역사회의 기관과 사람들을 틈틈이 만나는 과정에서 작은 실마리가 보이는 듯 했다.
“시설에 있을 때는 주말에만 나갈 수 있었어요. 그래서 시장에만 갔어요. 카드도 다 선생님한테 있었어요. 감옥 같았어요. 근데 여기는 나가고 싶을 때 내 마음대로 나갈 수 있어서 좋아요. 그리고 통장도 내가 가지고 있어서 좋아요.” - 김미화씨
일산장애인자립생활센터 체험홈에서 2년째 살고 있는 김미화씨(58)의 하루는 평범하다. 그런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누리기까지는 40년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시설에 들어가 생활하다가 2년 전 자립을 결심하고 체험홈 생활을 선택했다. 함께 하는 사람이 있어서 더 든든했는지 모른다. 시설에서 만나 결혼한 김쌤(62)이다. 청혼도 김미화씨가 먼저 했단다. 결혼한지가 벌써 15년이 됐다.
비장애인 사고로 중도장애 되기도
“동료상담 선생님이 추천해서 2박 3일 단기 체험을 먼저 했어요. 우리 엄마를 떠나 진짜 자립생활이 가능할까라고 걱정했는데, 오히려 여기 와서 자신감이 많이 올라갔어요. 빨래, 청소, 요리, 컴퓨터도 다 배웠어요. 이제 다른 사람 생일도 제가 챙겨요. 그전에는 까먹어서 전화도 잘 못했는데 축하전화도 하죠.” - 정근영씨
김쌤·김미화 부부와 같은 오피스텔 10층에 살고 있는 정근영씨(49세)는 40대 초반 뇌출혈로 인한 장애를 입은 중도장애인이다. 사고 이전에는 독립생활을 하며 회사생활이나 가게를 운영할 정도로 왕성한 사회활동을 했다. 갑작스레 장애가 나타난 이후에는 어쩔 수 없이 어머니 집에서 살면서 서로 힘들어 하는 시간이 이어지자 용기를 냈다.
이들은 체험홈 생활을 마치면 살 집을 마련해 자립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어떻게 자립이 가능한지, 혹시 범죄에 노출되거나 위험에 처하는 것은 아닐지 는 여전히 걱정스러웠다.
“물론 걱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반인들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범죄가 무서워서 아예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고 집에만 있는 사람은 거의 없잖아요. 체험홈에서 2~3년 살면서 교육을 통해 일상적인 활동이나 위험에 대처하는 방법 등에 대해 알려드리고 연습을 합니다. 이웃의 관심도 필요하죠. 체험홈 퇴소자들과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정보를 나누고 있어요. 서로 연락하며 도움을 주고 받다보면 충분히 자립해서 사실 수 있다고 봅니다.” - 김현경 일산장애인자립생활센터 자립생활팀 간사
고양시 500여명 장애인 시설 거주
올해 3월 기준으로 고양시 등록장애인 수는 4만1941명이고, 이중 중증 장애인은 1만5756명이다. 장애인 인구만 보면 경기도에서 2위, 전국에서는 3위(시·군·자치구 기준)를 차지할 정도로 고양시에는 장애인이 많이 산다. 고양시에는 홀트학교와 한국경진학교 등 특수교육기관이 4곳 위치해 있고, 장애인 거주시설에는 500명 가까운 장애인들이 살고 있다.
일산장애인자립생활센터 체험홈은 기존 장애인 거주시설 혹은 함께 살고 있는 가족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삶을 원하는 장애인들을 위한 공간이다. 그룹홈이 대규모 시설을 소규모화한 곳이라면 체험홈은 말 그대로 자립생활을 체험하며 시설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김현경 간사는 “현재 총 4채의 체험홈을 운영 중이라 아직 미미하기는 하지만 장애인을 위한 서비스가 시설중심에서 사람중심으로 변화되는 징표로 봐 달라”고 했다. 체험홈에서는 간접적으로나마 사회생활을 하고 개인과 지역사회의 관계에 대해 배우고 체험한다. 그 과정에서 센터 담당자와 장애인활동지원사가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도움도 제공한다.
장애인과 함께 하는 지역사회
“작년부터 조금이나마 좋은 일을 하고자 장애인분들과 어르신 분들에게 무료급식을 하고 있습니다. 가게 문 닫기 전까진 계속할 생각이구요. 간혹 이분들이 오시면 인상 찌푸리시면서 민망할 정도로 안 좋은 시선으로 쳐다보시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그런 분들은 저희 가게에 안 오셔도 됩니다.” - 홍태이 라이크라이크 대표의 인스타그램 글 중에서
지역사회의 이웃들도 이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일산동구 장항동에서 라이크라이크라는 브런치 카페를 운영하는 홍태이 대표는 어려운 분들을 위해 매월 수십 장의 무료급식 쿠폰을 제공하며 “처음이 어렵지 이것만큼 기분 좋고 보람 있는 일을 찾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장항2동행정복지센터 이태영 주무관은 “기업, 교회 등 종교단체에서 후원물품을 받아 전달해주는 것뿐 아니라, 라이크라이크와 아름다운가게 등과 협력해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찾아내고 지속적으로 소통하며 이웃 간 온기와 정을 전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했다.
체험홈을 나가면 살 집도 얻어야하고 음식도 스스로 해먹어야 한다.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주거와 생활문제일 텐데 이들에겐 이미 ‘다 계획이 있’었다.
“청약을 넣고 있어요. 그리고 저축도 하고 있어요. 집을 구할 때 병원, 식당, 일산장애인자립생활센터와 가까운데 구하려고요. 관리비도 적게 드는 데로 가야죠. 원래 가지고 온 식탁, 밥상, TV, 그릇도 다 가져갈 겁니다. 국가에서 주는 수급비용으로 알뜰하게 꾸려가면서 살려고 합니다.” - 김미화씨
“저는 아파트 신청해서 이미 해결됐어요. 운이 굉장히 좋은 것 같아요. 지축에 있는 집에 올해 10월에 들어가게 되죠. 거기서 저 혼자 살 겁니다. 저는 장애인인권 보조강사를 하면서 생계도 제 스스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 - 정근영씨
복지 ‘수혜자’가 아닌 ‘시민’으로
경제성장 과정에서 노동력이 없는 장애인은 노동력을 가질 수 있도록 재활을 시켰고, 그를 통해서도 경제활동이 어려운 사람들은 관리가 편한 거주시설로 보냈다. 그 과정에서 관리자의 편의가 더 앞서게 돼 입소자의 권리는 뒷전이 됐고 자기결정권은 서서히 없어지며 강력한 통제만 남게 됐다는 것이 김재룡 경기장애인인권포럼 대표의 진단이다.
일산장애인자립생활센터장을 겸직하고 있는 김 대표는 “장애인 당사자도 이제 거주시설에 의존하기보다 사회 속에서 자기 스스로 결정하고 삶을 살아가며 헌법에 보장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누리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며 “장애인이 복지 혜택만 받는 ‘수혜자’가 아니라 우리 곁에서 함께 생활하며 일하는 ‘시민’이 될 수 있도록 사회구성원들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