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최인훈 선생과 58년을 함께 한 아내 원영희씨

명동 다방서 “같이 살고 싶어요”
첫만남 때 서로 스며드는 느낌 
70년대 남편이 미국에 있을 때
아들의 사고와 시어머니의 사망
병원서 온힘으로 “굿모닝 허니”
이 말이 이승에서 마지막 인사  

[고양신문] 한국문학의 거목 최인훈 선생님이 타계한 지 3년이 되었다. 대학시절 최인훈 선생님의 『광장』이나 『회색인』 『서유기』 등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깊은 사유와 회의적인 태도에 매혹되어 선생님의 작품을 다 찾아 읽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선생님의 부인인 원영희 사모님을 만나러 갔다. 선생님은 종종 그 시대의 지배적인 리얼리즘에서 벗어나 환타지에 가까운 새로운 기법을 실험하기도 했는데, 선생님의 작품을 학위 논문의 주제로 삼았던 내게는 작품에 깊이 들어갈수록 전인미답의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는 듯한 즐거움이 있었다. 대학원 시절에 최인훈 선생님이 우리 세미나 시간에 참석해 같이 토론과 대화를 나누고 식사도 함께 하면서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눴던 기억도 새롭다. 이제 3주기를 맞아 선생님이 18년 동안 지내시던 고양 화정의 은빛마을 아파트를 찾아 선생님의 생전의 모습과 사모님의 추억을 나누는 인터뷰를 진행했다. 지난 해 이맘때에도 화정의 아파트를 찾은 적이 있는데, 사모님은 구면인 필자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76세의 연세에도 아직 고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사모님과 처음 만나서 데이트 하던 시절부터 결혼생활, 두 분의 깊은 애정, 선생님의 집필활동, 선생님의 마지막 순간까지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집에서 머무는 것을 가장 좋아하시던 선생님의 흔적이 집안 곳곳에 배어 있었다. 

원영희씨는 남편 최인훈 선생을 추억하며 때로는 눈물을 보이고 때로는 웃으면서 2시간 가까이 인 터뷰를 이어갔다. 원씨는 선생에 대해 “배우자는 내 반쪽이라고 하는데 저한테는 전부였던 사람”이 라고 말했다.
원영희씨는 남편 최인훈 선생을 추억하며 때로는 눈물을 보이고 때로는 웃으면서 2시간 가까이 인 터뷰를 이어갔다. 원씨는 선생에 대해 “배우자는 내 반쪽이라고 하는데 저한테는 전부였던 사람”이 라고 말했다.

▍1970년에 결혼하셨는데 두 분이 처음 만난 계기는?
저와 친한 친구가 우리 집 양반의 옆집에 살았는데, 어머님들끼리 이야기가 돼서 만나게 됐어요. 그런데 그 뒤에 연락이 안 오는 거예요. 분위기가 좋았는데… 나중에 생각보다 훨씬 늦게 연락이 왔어요. 왜 늦게 연락했는지 묻지는 않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처음부터 사이가 좋았어요. 

▍연애할 때는 주로 어디를 가셨어요?  
다방에서 주로 만났어요. 절 기다리는 동안 신문을 보고 있는데 내가 와도 모를 정도로 신문에 집중하고 있었어요. 집중력이 참 남다르구나 생각했죠. 만난 지 한 달쯤 됐을 때, 자주 만나지 않아 그 동안 서너 번 만났어요. 명동의 어느 다방에서 좁은 계단을 내려가는데 선생님이 먼저 내려가시면서 뒤에 따라가는 저한테 “같이 살고 싶어요”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내려가면서 팔짱을 꼈죠. 처음 만날 때부터 편안했어요. 그때까지 웬만한 남자는 성에 안 찼는데, 이 사람 말은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따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서로에게 스며드는 것 같았어요. 서너 번 만나고 결혼을 결정했어요. 

▍선생님은 글만 쓰는 전업작가였는데 경제적인 문제는 걱정되지 않으셨어요?
그런 건 전혀 염두에 없었어요. 마음에 드는 남자를 못 만나다가 같이 살고 싶은 남자를 만난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우리 둘은 마음을 합했는데 집에서 반대했어요. 어머니가 아들이 둘이나 있고 나이도 많은 사람하고 만난다는 말을 듣고 집에서는 난리가 났어요. 사실은 선생님이 조카 둘하고 같이 살았는데 아들이라고 잘못 소문이 났던 거예요. 반대가 심해서 결혼하지 말고 연애만 하자고 했더니, 데이트하다가 선생님이 집에 가자고, 그래서 따라가서 그때부터 살게 됐어요. 핸드백만 들고 갔다가 그 이후로 그냥 살게 된 거죠. 그런데 그렇게 못사는 집이 있는지 몰랐어요. 벽지가 덜렁거리고 흙이 우수수 바닥에 떨어지고, 그래도 행복했어요. 이게 다가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그 시절에 상당히 과감한 결정을 하셨네요.
 선생님이 “당신의 오늘 이 결정을 평생 잊지 않을게.” 하셨는데 그 약속을 지켜서 평생 한눈 안 팔고 사셨어요. “남편은 한 눈 팔 사이도 없겠네요.”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이를 좋아한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니는 제자도 있었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그 학생한테 네 감정을 글로 써와라 하는 과제를 내주셨어요. 

▍결혼하시고 나서 부모 형제들이 모두 미국으로 이민 가셨는데, 어떤 계기로 가셨는지, 선생님은 왜 안 가셨는지… 
큰 시누이가 먼저 이민 가서 하나씩 불렀어요. 선생님은 작가로서 한국어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 처음부터 여기 남아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아버님은 고향이 아닌 바에야 남한이나 미국이나 타향이긴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셨고, 그래서 아버님이 주도해서 북에서 남으로, 다시 미국으로 이주하신 거예요. 

▍선생님의 작품은 대단히 지적이고 깊고 넓은 사유를 보여주는 작품이 많지만 그런 와중에도 유머와 위트, 장난기도 많이 보이는데, 평소에도 장난기가 많으셨어요? 
많았어요. 하루는 “여보 내가 좋아할 만한 말 좀 해봐” 했더니 내 얼굴을 바라보면서 “사랑합니다” 하는 거예요. 계면쩍어서 “아유,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하지” 했더니 정말 입에 침을 발랐어요. 그렇게 장난기도 많고 유머가 대단했어요. 립서비스도 잘 하고….

▍1973년에 선생님이 아이오와 대학 초청으로 미국에 3년을 계셨는데 신혼에 혼자 지내시기 어렵지 않았나요? 
그런 생각을 못할 정도로 집안에 비극이 있었어요. 둘째 애를 가져 아들 데리고 친정으로 들어갔는데, 막내 동생이 애를 데리고 나갔다가 기차 사고가 났어요. 선생님 떠나신 지 두 달도 안 돼서, 아들이 겨우 세 살이었는데…. 선생님은 귀국하겠다고 했지만 말렸어요. 당신은 나라를 대표해서 갔으니 거기서 의무를 다 하라고, 아이는 내가 고친다고…. 그런데 아이가 다치고 한 달도 안돼서 시어머니가 뇌졸중으로 돌아가신 거예요. 병원 2층에 아이가 입원해 있고 지하 영안실에는 어머니가 계시고,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선생님도 귀국했다가 다시 나가셨어요. 

▍선생님이 미국에 계시는 동안에 어떻게 생활하셨나요?
<하늘의 다리> 원고료를 받게 해서 그걸로 생활하다가 나중에는 미국에서 도서관 사서 일을 하시면서 돈을 보내줬어요. 그러다가 고향 함경북도의 도지를 보게 됐고 거기서 아기장수 설화를 보시고, 서너 줄밖에 안 되는 글인데, 영감을 받아 희곡 <옛날옛적에 훠어이 훠이>를 쓰셨어요. 이걸 들고 가야겠다고, 그래서 귀국한 다음에 계속 희곡을 쓰셨어요. 

▍미국에 왜 그렇게 오래 계셨는지, 당시는 유신 시절이었는데 정치적인 압박은 없었나요?
직접적인 압력은 없었지만 중앙일보에 <태풍> 연재할 때 편집부장이 정보부에서 전화 왔었다고 조심하라는 연락도 있었고…. 미국에서 시동생이 한인신문 발행하면서 반 유신 운동을 했는데, 그분이 선생님께 미국 이주를 강력하게 권했어요. 하지만 희곡 때문에 다 각오하고 돌아오셨어요.

▍1977년에 서울 예대 교수로 가신 계기는? 이때 처음 생활이 안정됐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때 사모님 마음은 어떠셨어요? 
학장이신 유덕형 선생이 삼고초려했어요. 첫 월급 받고 처음 안정감을 느꼈지만 그 때문에 더 좋은 작품을 못 써서 많이 속상했어요. 이 양반이 워낙 완벽주의다 보니까 학교 일에 열과 성을 다 하셨어요. 결강이나 지각 한 번 안 하고, 평소 거추장스러운 복장을 안 좋아하는데 학교 가실 때는 꼭 정장에 넥타이 하고. 성실한 교수였다는 말을 동료 교수들, 조교들이 많이 했어요. 

▍일 년 동안 집 밖을 안 나오신 적도 있다고 들었는데, 선생님에게 집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일 년 만에 집 밖에 나와서 하늘이 신기하다고 바라보시고, 풀이나 꽃을 신기하다고 한참 바라보셨어요. 그렇게 좋아하면서 왜 안 나왔을까. 그것도 내가 데리고 나와야 나왔어요. 선생님에게는 집이 삶 그 자체였어요. 

▍평소에 친구분들이나 출판사, 동료 작가들과 교류는 없었나요?
없었어요. 그래도 당신은 외로워하지 않았어요, 집에 책이 있으니까. 제자가 와도 술도 권하지 않아요. 술을 안 마시는 이유가 정신이 흐려지는 것을 싫어했어요. 항상 책 보고 사색하고, 가끔 TV도 보시고. 주로 종교 방송을 보셨는데, 종교를 비교하시면서 엉터리 종교인들한테 격분하셨어요. 소리를 지르면서 ‘저 사기꾼 같은 놈들’ 하시면서요. 

▍그렇게 집에만 계실 때 선생님의 하루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궁금해요. 
아무 때나 자고 아무 때나 일어나 책 보시고 자다 깨서 새벽 2~3시에도 내가 일어나 있으면 “나 배고파” 이러는 사람이었어요. 그래도 난 아무렇지도 않고 힘들지도 않았어요. 평소에 워낙 집중하고 치열하게 사색하시는 분이라 정신적 노동이 심했어요. 그러다가 어떤 때는 쓰러져서 시체처럼 잘 때도 있었어요. 신혼 시절에는 이 양반이 눠워 잘 때 살았나죽었나 숨소리를 살핀 적도 있었어요. 언젠가 한의사가 맥을 짚어보더니 ‘이렇게 긴장해서 어떻게 사느냐고’, 늘 긴장하고 집중하는 삶이었어요. 한 순간도 자신을 놔두지 않았으니까요. 지금은 편하실 거예요. 가시고 나서 제일 슬픈 게 거실에 나오면 선생님 앉아 있던 소파, 거실 소파에 앉아 사색하시던 모습, 지금도 그 소파를 보면 슬퍼요. 

1970년 결혼 사진. 이 때 최인훈 선생은 38세, 아 내 원씨는 12살 아래였다. 아내는 “두 사람의 사랑 이 격렬했다기 보다 서로 스며드는 느낌의 사랑” 이었다고 말했다.
1970년 결혼 사진. 이 때 최인훈 선생은 38세, 아내는 12살 아래였다. 아내는 “두 사람의 사랑 이 격렬했다기 보다 서로 스며드는 느낌의 사랑” 이었다고 말했다.

▍사모님과 작품에 대한 얘기도 나누셨나요?
많이 하셨어요. 희곡 쓸 때는 나를 막 깨워서 이 대목 어떠냐고 묻고. 머릿속에 완벽하게 생각했다가 쓰기 때문에 쓸 때는 글 쓰는 물리적인 시간만 걸려요. 그럴 때는 신 내린 무당의 광기 같은 게 미친 사람 같았어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잠도 안자요, 그래서 억지로 마시게 하고. 생각이 정리되지 않으면 글을 안 써요. 특히 희곡은 영감이 없으면 쓰지 않았어요. <태풍> 2부를 구상해서 얘기해줬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끝내 쓰지 않았어요. 너무 아까워요. 

▍선생님의 고향 회령이나 월남 전에 사시던 원산 얘기도 하신 적이 있나요?   
  고향 회령 얘기를 가끔 하셨어요. 어릴 때 당신을 괴롭히던 친구를 혼내주고 겁이 나서 집으로 돌아온 얘기 같은 거. 선생님이 장남에 장손이라 어릴 때 집에서는 왕이었다고 해요. 베세토 연극제 때문에 북경에 갔을 때 잠시 짬을 내어 삼합에 갔는데, 언덕 위 정자에서 회령이 보여요. 저기가 기차가 다니던 길이라고 하시는데 마침 그때 기차가 지나갔어요. 거기서 고향을 향해 절하셨어요.

▍서울에 사시다가 2000년에 고양 화정을 선택해서 오신 이유는? 
  학교가 안산이라 그 동네 아파트를 봤는데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마침 화정으로 이사 온 친구 집에 집들이 갔다가 맘에 들어서 선생님과 보러 왔는데 대만족하셨어요. 숲이 좋고 널찍하게 자리잡고 공원도 넓고, 막상 와보니 사람들도 다 소박하고 좋은 거예요. 화정이라는 이름도 예쁘다고 좋아하셨어요. 꼭 저랑 같이 공원 산책하시고. 식사도 혼자는 안 해요. 제가 있어야 하세요. 한 번은 외출하려다가 날짜를 잘못 알아서 오 분만에 다시 들어오는데, 그때 제가 넓은 스커트를 입고 있었어요. 이 사람이 너무 좋아서 360도 돌면서 제 스커트 밑자락에 키스를 하는 거예요. 

▍호수공원에는 자주 가셨나요.
  장미축제 때는 꼭 가셨어요. 특히 흑장미를 좋아하셨는데 장미 동산에 아무리 찾아도 흑장미가 없다고, 모란 튤립도 좋아하셨어요. 하지만 꽃 축제는 안 갔어요, 사람 많은 데 가는 거 싫어해서. 호수공원 벤치에 앉아서 호수를 바라보는 걸 좋아하셨어요. “참 좋은 데야.” 하시면서… (사모님은 계속 선생님의 추억을 이어갔다.)

늘 저랑 같이 외출하셨어요. 배우자는 내 반쪽이라고 하는데 저한테는 전부였어요. 이 사람도 내가 전부였던 거 같아요. 그래서 내가 이 사람을 보내는 게 더 힘들어요. 마지막인 걸 알았을 때 깊이 안아주면서 “좋은 아내였어.”라고 말하는데 “당신도 좋은 남편이었어.”하는 말을 못했어요. 그게 두고두고 후회돼요. 

아침마다 다정하게 안아주면서 “굿모닝 허니”하고 뺨에 뽀뽀를 했는데, 병원에 계실 때 내가 평소에 하는 것처럼 ‘굿모닝 허니’라고 했더니 이 사람이 ‘굿모닝 허니’라고 버럭 큰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목소리가 안 나와 온몸의 힘을 끌어모아 말씀하신 거예요. 그게 마지막 말이었어요.
(사모님은 한동안 흐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2016년경 부부의 다정한 한 때
2016년경 부부의 다정한 한 때

저는 내세나 환생을 안 믿는데, 꿈에 이 사람이 나타났어요. 어떻게 돌아왔냐고 하는데 그때 아들이 아빠가 살아 돌아오셨다고 물을 엎치고 난리치는 바람에 잠이 깼어요. 화장실에 갔다가 몸이 이상해서, 제가 당뇨가 있어요, 혈당을 재보니까 저혈당이 심해서 그냥 잤으면 죽었을 거예요. 내가 너무 힘들어서 이 사람 따라갈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나보고 더 살다오라는 말인가보다 하고 나쁜 생각을 접었어요. 


 두 번째 꿈은 울면서 날밤을 새니까 어지럽고 잠도 못자고, 우울증 약 처방을 받았지만 약도 안 먹고 만두만 먹을 때였어요. 당뇨 때문에 먹기는 먹어야 하니까. 꿈에 이 양반이 너무 집에만 있지 말고 사회 활동도 하라고, 길잡이 해줄 분 모시고 왔으니 식사대접을 하래요. 그래서 만두를 준비했더니 아니라고, 그것 말고 더 화려하고 다채롭게 많이 차리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이 잘 먹으라는 뜻이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이 양반이 세 번째 꿈에 나타나서 당신이 너무 울어서 왔다고, 그렇게 울면서 지내지 말라고 하는데, 이처럼 내 상황에 맞게 나타나는구나, 나를 보살펴주느라 좋은 데 가지도 못하고 내 주위를 맴도는구나 싶어서 ‘이 사람 놓아줘야지’하고 생각하게 됐어요

선생님의 추억에 젖어 사모님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파리여행 갔을 때 선물 사 오신 이야기, 아들이 사준 지팡이를 마다하고 아파트 앞 은빛공원에서 주워온 나뭇가지를 짚고 다니시던 이야기, 암 진단을 받고 입원했던 일산병원과 명지병원 의료진들의 친절함과 성의에 대한 고마움 등. 손자를 못 보고 떠나신 게 너무 아쉽다고 하시면서 긴 인터뷰를 마쳤다. 세상에 아내에게 이렇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 남편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선생님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꼈던 시간이었다. 

이인숙 문학평론가·고양최인훈도서관추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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