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신문] 온몸이 전율했다. 책 속에서 문자로만 만나던, 그 깊이와 크기를 가늠할 길이 없던 그 정신(Geist)이 바로 내 눈 앞에 앉아있었을 때였다. 1994년 여름,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였다.
나는 그때 영국에서 박사과정 학생이었는데 논문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그해 여름 모스크바에 머물렀다. 어느 날 거리를 걷다가 연극 공연포스터 한 장과 마주쳤다. 러시아어로 쓰인 제목을 읽어보니 ‘봄이 오면…’이라고 되어 있었다. 자세히 읽어보니 최인훈 선생의 ‘봄이 오면 산에 들에’ 공연 포스터였다. 나는 그해 봄 출간된 ‘화두’를 읽고 한해 내내 ‘화두 앓이’를 겪었다. 그 책을 통해 최인훈 선생이 자신의 희곡 작품이 무대에 올려질 때 개막 공연에 참석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의 예측은 어긋나지 않았다. 선생은 공연에 참석하셨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 극장 로비에서 리셉션이 개최되었다. 나는 몇 발짝 거리를 두고 선생 주변을 배회하면서 선생께 말을 붙여볼 기회를 엿보았다. 마침 선생께서 혼자 계시게 된 것을 보고 선생께 다가갔다. 빠짝 긴장한 상태에서 꺼낸 말은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라고 하는데 선생님의 대학후배입니다.” 선생은 그 말을 들으시고 심드렁하게 ‘아, 그러세요’라고 답했다. 선생의 냉랭한 답을 듣자 당황해서 어떻게 대화를 이어나갈지 몰랐다. 그때 내 입에서 “선생님, 제가 ‘화두’를 읽었습니다”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이 말에 대한 선생의 반응은 조금 전과 180도 달랐다. 선생은 반색을 하며 “아, 그래요. 어떻게 읽었나요?”라며 내 의견을 물어오셨다. 나는 용기를 얻어 “법학 전공자인 제가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깊고 풍성한 텍스트를 누리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선생은 “그 ‘텍스트’라는 표현, 참 마음에 듭니다”라고 하며 좋아하셨다. 화두가 출간된 직후 이 책이 소설에 속하는가를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다고 들었다. 이 책은 통상적인 장르 구분을 초월한 보편적 텍스트임에도 지엽적인 논쟁이 벌어진 셈이다. 선생께서는 그러한 논란을 잠재울 수 있는 ‘텍스트’라는 단어가 가슴에 와 닿았던 듯하다. 그날 저녁 모스크바 거리를 함께 걸으며 선생과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1998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다음에도 가끔씩 선생을 찾아뵈었다. 2005년을 전후한 시기에 고양시 화정에 있는 댁으로 몇 번 찾아가 긴 대화를 나누곤 했다. 선생은 대단히 정밀한 언어를 구사하셨다. 한 마디 한 마디가 깊은 사색에서 우러나왔고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 적으면 훌륭한 글이 될 것 같았다. 그 시기 선생께서는 중국의 부상(浮上)이 한반도의 장래에 끼칠 영향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 자신을 ‘남북조 시대의 소설 노동자’로 규정하고 민족통일에 대한 열망을 지니고 산 선생께서는 당신의 작품들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듯이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에 날카롭고 깊게 관찰하셨다.
선생을 만날 때마다 문학 전공자가 아니라 아마추어인 나의 의견을 주의 깊게 들어 주셨던 것이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나는 ‘최인훈=광장’이라는 일반적 인식 때문에 선생의 깊고 풍부하고 다양한 작품 세계의 전모가 잘 알려지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했다. 한번은 선생께 “스타일의 관점에서는 ‘하늘의 다리’를 참 좋아합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선생은 이 말을 반기시며 이 작품의 배경과 맥락에 대해 상세히 말씀해 주셨다.
2018년 여름 선생의 투병 소식을 듣고 고양의 명지병원으로 찾아뵈었을 때 선생의 병세는 많이 악화된 상태였다. 그때 나는 최인훈 선생이 ‘정신적인 존재’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선생은 육신이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에서도 며느님이 읽어 드리는 자신의 작품(‘문학과 이데올로기’)을 꺼져가는 힘을 모두 동원해 듣고 계셨다.
나는 선생의 작품 중에서도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무척 아낀다. 15장으로 이루어진 이 연작소설은 뛰어난 변주곡이다. 제13장(‘남북조시대 어느 예술노동자의 초상’)에서 선생은 화가 이중섭의 위대함을 “모든 사람이 제 얼은 빠져서 유리처럼 부숴지고 피비린내 나는 땅에서 귀신처럼 허덕일 때 그 속에 살면서 자기 목숨의 길을 잃지 않고 운명의 길목에서 만나는 것마다 그것이 소재든 수법이든, 사상이든, 신비(神秘)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한 가지 주제, 그 자신의 목숨의 걸음걸이 속에 끌어들여 그의 삶의 <揷話>로 만들었다는 것”에서 찾고 있다. 인용한 문장은 바로 남북조 시대 어느 위대한 소설 노동가, 최인훈 선생의 자화상에 다름 아닐 것이다.
최인훈 선생의 육신은 3년 전에 우리 곁을 떠났다. 그러나 선생의 책을 펼치면 도저하고 웅혼한 정신으로서의 최인훈, 또한 그 정신이 빚어내는 깊은 울림을 만난다. ‘영원한 현재성’을 지닌 선생의 작품들은 정교하면서도 아름다운 언어로 인류의 ‘두개골 화석의 대뇌피질부에 대한 의미론적 해독’(‘서유기’ 서문)을 제시한다. 선생의 작품들은 평범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규모와 복잡성으로 다가오는 문명과 자연의 오의(奧義), 그 난수표를 풀 수 있는 암호를 계속 보내 준다. 나는 오늘도 최인훈 선생의 텍스트를 읽고 전율하며 그 전율 속에서 그를 만난다.
이근관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