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주산성에 숨은 보석같은 이야기를 찾아서 [연재순서]

삼국시대~조선시대, 덕양산과 행주강   
개화기~경제개발시대, 숨 가쁜 역사 
평화의 염원 품은 생태·감성 공간으로   

1970년대 행주산성 성역화 사업을 통해 호국 성지로 단장된 행주산성. 
1970년대 행주산성 성역화 사업을 통해 호국 성지로 단장된 행주산성. 

가장 먼저 개화의 바람이 불어온 행주 언덕 
행주마을 곳곳에 깃든 독립지사들의 숨결
전쟁 격전지… 70년대 진행된 성역화사업 

[고양신문] 오랫동안 닫혀있던 조선이라는 나라의 빗장이 열린 개화기, 낯선 이들과 낯선 문물이 가장 먼저 도달했던 곳 역시 행주나루였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흔적이 바로 행주외동 언덕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행주성당(10)과 행주교회(11)다. 

행주성당은 서울 명동성당, 약현성당과 함께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한 성당으로 손꼽힌다.아름다운 한옥 기와를 얹고 있는 행주성당은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 종교건축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개화의 바람을 타고 행주 언덕에 지어진 행주성당.
개화의 바람을 타고 행주 언덕에 지어진 행주성당.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한 행주교회 역시 우리나라 개신교 선교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19세기 말 인천 제물포항을 통해 우리땅을 밟은 미국 장로교 첫 선교사인 언더우드 선교사가 직접 세운 초기 교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행주성당, 행주교회와 함께 오랜 역사를 간직한 행주서원(12)을 둘러보는 것으로 흥미로운 행주마을 종교유산 나들이 코스를 짤 수도 있다.  

행주외동에 자리한 행주서원.
행주외동에 자리한 행주서원.

고양 들녘 적시는 관개농업의 출발점

고양 땅 한강변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춘 것은 일제강점기 때부터다. 한반도 전역에서 농업생산량을 높여 일본 본토의 식량난을 해결하려 했던 일제는 거대한 한강 제방인 대보뚝을 쌓아 고양 땅 남서쪽 습지대를 농경지로 변모시켰다. 

근대적 치수(治水) 시스템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흔적은 창릉천이 한강과 만나는 어귀에 서 있는 고양 행주수위관측소(高陽 幸州水位觀測所)(13)다. 마치 등대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구조물은 1916년 만들어져 1979년까지 한강물의 수위를 측정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며, 건립 당시의 토목 기술과 수위 측정 방식 등을 알려주는 가치를 평가받아 등록문화재에 이름을 올렸다.  

창릉천과 한강이 만나는 하구에 자리한 고양 행주수위관측소.
창릉천과 한강이 만나는 하구에 자리한 고양 행주수위관측소.

마른 땅을 만든 것은 대보뚝이었지만, 그 땅을 쓸모 있는 농경지로 만든 이는 독립지사인 양곡 이가순(陽谷 李可順)선생이었다. 원산 등지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신간회 원산지회와 대성학교를 세우는 등 독립운동에 힘을 썼던 이가순 선생은 만년에 고양 땅에 정착해 천수답에 기대어 사는 농민들을 위해 관개사업을 전개했다. 덕양산 아랫자락에서 퍼올린 한강물을 농수로로 흘려보내 능곡과 일산들녘을 적시고자 했던 이가순 선생의 과업은 아들 이원재 선생이 이어받아 비로소 완공을 보았고, 훗날 지역주민들은 부자의 공덕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

이가순 선생이 한강물을 퍼올렸던 자리에는 오늘날 한국농어촌공사 행주양수장이 자리하고 있고, 양수장 정문 앞에는 고양 땅 농업 역사의 소중한 유산인 이가순 관개송덕비(李可順 灌漑  頌德碑)(14)가 소박한 모습으로 옛 얘기를 증언하고 있다.         

고양 땅 관개사업의 선구자 양곡 이가순 선생을 기리는 송덕비.
고양 땅 관개사업의 선구자 양곡 이가순 선생을 기리는 송덕비.

선상만세운동과 애국지사들의 흔적 

덕양산과 행주나루 일대를 이야기하며 빠뜨리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역사가 바로 일제강점기를 관통하며 이어진 항일의 발자취다. 100여 년 전 기미년 봄, 서울에서부터 들불처럼 번져오는 만세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할 수 있었던 행주 주민들은 누구보다도 뜨겁게 만세운동을 펼쳤다. 특히 시위를 진압하려는 일제의 군경을 피해 행주나루에서 배 위에 올라타 강물 한가운데서 만세를 외쳤던 선상(船上)만세운동(15)은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행주마을의 특별하고도 자랑스러운 역사다. 

중국과의 뱃길이 이어지는 행주나루는 도산 안창호(安昌浩) 선생을 비롯해 여러 독립지사들이 한조각 단심(丹心)을 부여안고 고국땅을 떠났던 비통의 장소이기도 했다. 행주산성역사공원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1910년 망명길에 오르면서 당시의 심회를 읊은 우국가사인 거국가(去國歌)(16)가 적혀있는데, 사랑하는 조국을 떠나야 하는 울분과 함께 조국의 광명을 염원하는 간절한 다짐이 절절히 담겨있다.

행주산성역사공원에 세워진 도산 안창호 선생의 '거국가' 기념물.
행주산성역사공원에 세워진 도산 안창호 선생의 '거국가' 기념물.

앞서 이야기한 양곡 이가순 선생과 함께 고양을 대표하는 독립지사로 손꼽히는 인물은 바로 동암 장효근(東菴 張孝根) 선생이다. 언론과 출판을 통해 민중계몽운동을 펼친 장효근 선생은 기미년 3월 1일 종로 태화관과 탑골공원에서 처음 뿌려진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인쇄한 실무 책임자였다. 노년에는 고향인 행주내동으로 돌아와 후학을 가르치고 농민들의 권익을 위한 활동을 어갔다.

1931년 ‘충장공 권율장군 기공사수리기성회’를 조직해 민족의 표상인 권율 장군 사당을 다시 세우는 일을 주도한 이도 동암 선생이었다. 행주산성 주차장에서 행주내동 먹거리촌으로 이어진 마을길을 따라 내려오다 다시 숲으로 향하는 작은 길로 들어서면 덕양산 기슭에 동암 장효근 선생이 만년을 보내신 생가터(17)가 남아있다.

매년 3월에 열리는 행주나루 선상만세운동 기념 행사. 
매년 3월에 열리는 행주나루 선상만세운동 기념 행사. 

동족상잔과 분단 역사의 아픈 흔적 

독립지사들의 분투와 희생이 헛되지 않아 조국 해방을 맞았지만, 불행히도 역사는 남북 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치달았다. 6·25 한국전쟁에서 덕양산 일대는 또 한 번의 군사 요충지로서의 진가를 드러낸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한·미 연합 해병대가 1950년 9월 20일 서울 탈환의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한강 도하작전을 성공시킨 역사적 장소가 바로 덕양산 아래 행주강가였다. 행주산성 입구 버스정류장에는 해병대 한강 도하를 기념하는 현충시설인 해병대 행주도강 전첩비(海兵隊 幸州渡江 戰諜碑)(18)가 세워져 있고, 전첩비 앞에는 수륙양용장갑차도 놓여있다. 

인천상륙작전에 이은 국군의 한강 도하작전을 기념하는 해병대 행주도강전첩비.
인천상륙작전에 이은 국군의 한강 도하작전을 기념하는 해병대 행주도강전첩비.

대결의 긴장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1960년대 후반 월남전이 확전되며 덩달아 남북 관계도 국지적 무력충돌 양상으로 악화되었다. 당시 북한은 무장공비 침투 경로의 하나로 한강 하구를 이용하곤 했다. 결국 수도방위에 사활을 걸어야 했던 군 당국은 한강변을 따라 기나긴 철책을 둘렀고, 수십 년 세월 동안 고양의 한강 수변은 민간인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는 금단의 땅이 되고 말았다. 행주산성역사공원의 한쪽에는 철책선 일부를 보존(19)해놓아 한강 하구가 엄혹했던 긴장감에 사로잡혀있었던 시절을 증언하고 있다.     

콘크리트로 지어 올린 행주산성 성역화 사업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행주산성은 1960년대 ‘행주산성 성역화사업’을 통해 기본 구조가 갖춰졌고, 이후 각종 건물과 사당, 동상 등의 시설들이 하나하나 자리를 잡았다. 중앙집권적 권력과 숨가쁜 경제개발 시대로 상징되는 시절, 국가가 주도하는 공적 공간 구성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콘크리트 소재로 한옥의 외양을 지닌 건축물을 만드는 것이었다. 전통에 기대어 국가의 권위를 표방하고자 했던 강박과 경제적이면서도 견고한 구조물을 빠른 일정 안에 짓고자 하는 욕구가 결합한 결과물이 바로 콘크리트 한옥이었다. 

모두가 기억하다시피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역시 전통 목조건축으로 복원되기 전까지 단단한 돌덩어리에 단청 페인트가 덧입혀진 ‘콘크리트 광화문’이 백악산을 등지고 서 있었다. 행주산성 역시 마찬가지여서 대첩문(20)을 비롯해 충의정과 대첩기념관, 덕양정과 진강정, 그리고 충장사 홍살문(21)과 같은 주요 건물과 기념구조물이 모두 이 시기에 콘크리트 소재로 만들어졌다. 행주산성 성역화 사업의 방점을 찍은 구조물은 바로 덕양산 정상에 우뚝 솟은 신행주대첩비(22)다. 현충사와 행주산성 등 호국 성지의 성역화작업을 이끈 박정희 대통령은 신행주대첩비에 직접 자신의 필적을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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