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포럼 100회 기념특강
정범구 전 주독대사 '독일에서 바라본 한반도'
동서독 교훈·반면교사 삼아
통일 이후 사회상 고민 필요
정권 바뀌어도 '일관성' 중요
상생 속 실질적 통일 이뤄내야
[고양신문] 2011년 4월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의 강연으로 시작한 지역 담론장 ‘고양포럼’이 어느새 100회를 맞았다. 지난 13년을 돌아보고 새로운 미래를 살피는 이번 포럼에서는 정범구 전 주독대사가 ‘통일’을 주제로 다시 한 번 마이크를 잡았다. 18일 일산동구청에서 ‘독일에서 바라본 한반도’라는 주제로 강연을 맡은 정 대사는 16·17대 국회의원에 이어 지난 2018년 주독대사로 3년간 임기를 지낸 고양시민이다.
이날 강연에 앞서 정 전 대사는 “고양이 시민문화가 활성화된 몇 안 되는 도시 중 하나라는 점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한 배경에는 고양포럼같은 공론장의 존재가 있었다”라며 “당파적 사고로 상대방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요즘, 열린 가슴으로 의견을 주고받는 뜻깊은 이번 포럼에서 시민들이 만들어 갈 ‘통일’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싶다”라며 미소를 보였다. 이날 강의 내용을 정리한다.
막연한 ‘우리의 소원’…남북관계 ‘독’ 될 수도
한반도 통일을 말할 때, 이제는 단골손님처럼 함께오는 주제가 있다. 바로 ‘동서독 통일’. 이념을 초월한 사랑을 보여준 베를린 장벽 붕괴는 우리 가슴 속에 선명히 남아있지만, 통일 이후 독일 사회의 모습은 많이 알려져있지 않다. 독일 통일 33주년인 올해는 통일 후 태어난 세대가 완전한 성년이 된 해로 현재 독일의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통일 이후 맞이할 사회에 대한 ‘예고편’과 같다.
33년 동안 통일 독일이 마주하고 있는 불편한 질문이 있다. 바로 '장벽은 정말 무너졌는가?'다. 서독 주도하에 동독이 흡수되는 형태로 통일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틈에서 여러 갈등이 피어났다. 동독 사람들은 통일 후 서독 깍쟁이들의 도움으로 함께 신독일을 건설할 것이라 기대했지만, 그들이 마주한 것은 차별이었다. 통일 과정에서 동부 지역의 주요 요직이 서독 인사들로 대체됐고, 대부분의 동독 출신 대학교수도 해임됐다. 동독 사람들에게 장벽 너머 서독은 일종의 ‘점령군’이었던 셈이다.
이때 자리 잡은 지역갈등은 아직도 동독 사람을 뜻하는 오씨(Ossis)와 서독 사람을 뜻하는 베씨(Wessis)라는 멸칭 속에 남아있다. 현재 구동독 지역인 튀링겐주에서 극우주의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이 높은 지지를 받는 것도 이때 동독 사람들의 실망감에서 비롯됐다.
오늘날 남북문제와 통일은 그야말로 생존 문제다. ‘통일’이라는 뇌관 하나만 잘못 터져도 재앙이 될 수 있다. 막연히 통일을 목표로 잡는 것이 아니라 상호협력 속에서 조금씩 접점을 늘려나가는 것이 옳은 방향일 것이다.
정권 바뀌어도 ‘대북기조’ 유지해야
지난 동서독 통일에서 잡음이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일관성’이다. 서독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독일의 유일한 합법정부는 서독이라는 이른바 ‘할슈타인 원칙’을 내세워 왔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빌리 브란트 총리를 위시한 사회민주당이 1969년 집권하며 새 국면을 맞이한다.
바로 동독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고 협력을 이어 나간 것. 이후 사민당이 실각하고 기존의 보수정당인 기독교민주연합 출신 헬무트 콜 총리가 취임했지만, 새 정부는 기존 동독과의 협력을 이어 나간다. 이는 정권이 바뀌면 전임 정부의 대북정책이 모조리 파기되는 한국과 대조적이다.
서독은 정부가 바뀌어도 동독에 대한 일관된 태도를 유지했다. 이는 서독 내 보수·진보, 여·야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동서독 관계를 ‘정치’의 문제가 아닌 ‘민족’의 문제로 여긴 이유가 가장 크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전임 정부의 남북 정책을 상당 부분 폐기하는 점, 한국전쟁이라는 내전의 아물지 않은 상처와 갈등들이 존재하는 점 또한 ‘한민족 문제’ 해결에 발목을 잡는 듯하다.
‘먼 미래 통일’ 아닌 상생 통한 ‘실질적 통일’
우리가 앞으로 마주할 ‘통일’은 어떤 형태로 이루어져야 할까. 그 전에 ‘통일’이 가능하긴 할까. 당시 동독에 비해 3배 가까이 차이 난 서독의 개인소득과 달리, 오늘날 남한의 개인소득은 북한의 28배다. 독일과 달리 깊은 상처를 남긴 내전, ‘한국전쟁’과 오늘날 젊은 세대의 관심사에서 ‘통일’이 멀어진다는 점은 한국이 전부터 노래한 ‘통일’이 과연 가능할지에 대한 의구심을 키운다.
이에 대한 해결책이 바로 ‘상생’이다. 막연한 ‘통일’을 목표로 할 것이 아니라 상호협력을 이어 나가며 북한의 생활 수준을 남한에 가깝게 끌어올리는 것이 우선이다. 흡수통일 방식으로 이미 동독 시민들이 겪은 차별들이 알려진 가운데 북한 공민들이 과연 남한 주도 통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할까? 북한의 시장을 잡아먹는 것이 아닌 동등한 위치의 '협력'에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이야말로 삼국시대 때부터 이어져 온 ‘통일’과 ‘민족’에 대한 소중한 경험의 가치를 깨달을 때이고, 현실감 없는 ‘통일’에 앞서 남북긴장을 해소해 여러 상생 속에서 ‘실질적’ 통일을 이뤄내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날 젊은 세대가 원산의 맛집을 검색하고, ‘함흥차사’라는 말을 직접 함흥에 가봐 깨달을 수 있는, 또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베를린까지 올 수 있는 그런 한반도를 물려주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