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신문 생태평화기행 '두루미의 땅, DMZ를 걷다'
DMZ 곁 숨겨진 생태보고, 용양보 습지
두루미들 나타날 때마다 버스 안 ‘탄성’
12월 연천, 1월 철원, 2월 파주 이어져
[고양신문] 올겨울 고양신문이 재미있는 테마여행을 진행하고 있다. ‘두루미의 땅, DMZ를 걷다’라는 제목을 내건 이번 프로그램은 한겨레신문 선임기자 퇴직 후 고양신문과 함께하고 있는 박경만 생태전문기자가 기획한 생태평화기행으로, 지난해 12월 연천여행에 이어 1월 철원여행, 2월 파주여행까지 3회차로 진행되고 있다. 사실 『두루미의 땅, DMZ를 걷다』는 박경만 기자가 출간한 책 제목이기도 하다. 그동안 글과 사진으로만 접했던, 좀처럼 찾아가기 힘든 DMZ 인근의 생태와 역사 명소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라 지난 18일 철원여행에 설레는 마음으로 동행했다.
꽁꽁 언 한탄강 걷는 물윗길 트레킹
오전 8시, 36명의 참가자들이 일산동구청에서 출발하는 버스에 올랐다. 부부와 모녀 등 가족과 함께 참가한 이들이 많았고, 고양신문 행사에 단골로 참가하는 반가운 독자들의 얼굴도 보인다. 한탄강의 자연, 두루미들의 생태, 민통선 안쪽 DMZ생태평화공원, 철원노동당사 등 이날 들를 장소들에 대한 박경만 기자의 꼼꼼한 설명을 듣다 보니 어느새 한탄강 고석정에 도착했다. 이곳에서부터 은하수교까지, 꽁꽁 언 강물 한가운데를 부교를 따라 걷는 한탄강 물윗길 트레킹의 재미를 잠시 맛보는 게 이날 일정의 첫 순서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강가로 내려가다 보면 눈과 얼음에 덮인 강물 위로 가느다란 부교길이 우아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환상적인 풍경이 방문객을 반긴다. 강물 위로 우뚝 솟은 바위가 임꺽정의 전설이 전해내려오는 한탄강 고석인데, 물윗길에 입장해 올려다보는 바위의 모습은 위쪽 전망대에서 내려다볼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물윗길은 부교 구간과 강변 구간, 빙판과 여울 계류, 갈대밭과 돌밭이 번갈아가며 이어진다. 한겨울 얼음장 사이로 쏟아지는 물줄기를 가까이에서 만나니 가슴속까지 시원해진다. 돌멩이가 밟히는 코스에서는 누군가 소박한 소원을 빌며 정성 들여 쌓았을 작은 돌탑들도 어김없이 나타난다.
승일교 옆 빙벽에서 펼쳐진 겨울축제
하얀 설원 위에 드리운 나무그림자를 감상하며 걷다 보니, 멀리 두 개의 다리가 겹쳐진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주황색 철제 다리는 근래에 만든 한탄대교이고, 그 뒤로 보이는 오래된 다리가 한국전쟁 전후에 지어진 ‘승일교’다. 전쟁 전 북한에서 공사를 시작해 전쟁 후 남한에서 완성한, 남북합작 다리로 유명하다. 이승만의 ‘승’자와 김일성의 ‘일’자를 따서 승일교가 됐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지만, 사실은 다리 공사를 주도한 박승일 장군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승일교 인근 거대한 얼음빙벽이 있는 곳에서는 ‘한탄강 얼음트레킹 축제’가 펼쳐지고 있다. 다양한 방법으로 겨울 추위를 즐기는 이들의 활기가 축제장에 가득하다. 넓은 마당바위를 지나니 머리 위로 은하수교가 허공을 가로지르고 있다. 물윗길은 태봉대교까지 이어지지만, 일행은 다음 일정을 위해 은하수교 위에서 한탄강 주상절리 절경을 눈에 담는 것으로 물윗길 트레킹을 마무리했다.
차창 밖을 스치는 두루미 가족 풍경
점심식사 장소인 민통선 안 정연리 마을로 들어가는데, 군 초소를 통과하는 절차가 철저하고 삼엄하다. 주민들이 차려낸 정갈하고 푸짐한 음식들이 긴장됐던 마음을 따뜻하게 풀어준다. 한국전쟁 이전 북한땅이었던 정연리에는 ‘금강산 철길마을’ 안내지도가 걸려있다. 철원역을 출발해 내금강역까지 내달렸던 ‘금강산 전기철도’가 지나던 마을이기 때문이다. 마을회관 마당 한쪽에는 유사시 주민들이 몸을 피할 수 있는 지하 대피소 입구도 보인다.
식사를 마치고 DMZ생태마을인 생창리로 이동하는 동안 참가자들은 창 밖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황량한 겨울 농경지 곳곳에서 두루미와 재두루미 가족들을 여러 번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두루미들의 모습이 포착될 때마다 여기저기서 작은 탄성이 터진다. 두루미와 재두루미, 흑두루미 등을 모두 볼 수 있는 철원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두루미의 땅이다. 여름에는 북쪽의 시베리아나 아무르강 유역에서 번식을 하는 두루미 가족들은 매년 겨울을 나기 위해 철원을 찾는다고 한다. 민통선과 DMZ 인근이 사람들에게는 접근이 쉽지 않은 땅이지만, 두루미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겨울 삶터인 모양이다.
긴장된 마음으로 통과한 민통선 초소
또다시 민통선 초소를 지나 생창리마을로 들어섰다. DMZ생태평화공원 투어는 마을주민 해설사가 직접 가이드를 하고, 군 장병 한 명도 내내 탐방단과 동행한다. 육중한 철책문을 통과해 용양보 둘레길로 걸어가는 동안 해설사의 구수한 입담이 쉴 새 없이 이어지는데 흥미진진한 포인트가 한둘이 아니다. 조선시대 한양에서 경흥까지 이어졌던 경흥대로, 이성계와 함흥차사 이야기, 1924년 운행을 시작해 1931년 내금강역까지 이어진 동아시아 최초의 전기철도였던 금강산 가는 열차, 아직도 못 찾은 박수근 화백이 묻었다는 그림들, 한국전쟁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던 저격능선 전투, 남북으로 갈리며 잊혀진 지명이 된 김화, 민통선 마을의 가슴 시린 역사, 정주영 회장의 고향방문….
천혜의 자연과 분단의 아픔을 동시에 품고 있는 생창리마을은 이제 방문객들에게 생태와 평화의 가치를 전하는 땅으로의 변신을 꿈꾸고 있다. 역사의 상처들을 스토리텔링 콘텐츠로 만들어가려는 주민들의 적극적인 노력이 인상적이다.
금강산 전기철도 건너던 용양철교
본격적으로 용양보 둘레를 돌며 DMZ생태평화공원 탐방을 시작한다. 용양보는 1970년대 민통선 마을이 만들어지던 시기에 농지 개간을 위해 화강을 가로지른 용양철교 교각 사이를 막아 만든 저수지다. 이후 50여 년 세월 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용양보 주변은 생물다양성이 풍부한 아름다운 생태습지가 됐다. 꽁꽁 언 습지를 덮고 있는 하얀 설원과 수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왕버들숲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경관을 연출한다.
습지 초입에는 철원역을 출발해 금강산으로 달려가던 전기철도가 화강을 건너던 용양철교가 오랜 세월을 이겨낸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해설사는 “한국전쟁 당시 철교를 건너던 인민군 화물객차가 미군의 폭격을 받아 강물로 추락해 지금은 마을 가까이까지 떠밀려왔는데, 주변이 지뢰지대라 발굴조사를 못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름다운 풍경에 깃든 아픈 역사
철교 옆에는 디딤판이 대부분 떨어져나간 출렁다리가 앙상한 흔적으로 남아있다. 용양보 조성 후 군 수색정찰로로 사용되다가 폐쇄된 출렁다리는 물새들의 놀이터가 됐다. 용양보는 비무장지대 유일의 습지보호지역으로, 국제 람사르습지로도 지정됐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분단 이후의 근현대사,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감싸 안는 자연의 넉넉함이 중첩되는 감동적인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습지의 북쪽 끄트머리, 이중 삼중 철조망에 막혀 더이상 올라갈 수 없는 지점에서 주변을 돌아보니 좌우로 산 능선을 따라 철조망과 초소들이 이어져 있다. 해설사가 인군 오성산과 계웅산 일대에서 비극적이고도 소모적인 고지전이 치러졌던 한국전쟁 당시의 참상을 실감나게 들려준다. 철책과 초소들은 군사시설이라 카메라에 담을 수 없어 두 눈과 가슴으로 아픈 풍경을 저장한다.
왕버들 숲 가로지르는 철길 포토존
좀 더 걷다 보니 김화역 포토존이 나타나고, 과거 기차가 달리던 노반을 따라 조성한 철길 탐방로가 시작된다. 고요한 숲속을 가로지르며 나란히 뻗은 철길 위에 하얀 눈이 덮인 풍경을 배경 삼아 너도나도 멋진 인증샷을 남긴다.
철길 탐방로와 용양철교가 만나는 지점에는 옛 금강산 전기철도 객차를 재연해놓은 포토존이 자리하고 있다. 객차에 올라 창밖으로 펼쳐진 용양보의 고요한 겨울풍경을 감상한다. 열차 옆에는 동남쪽으로는 철원, 서북쪽으로 내금강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서 있다. 70년이 넘는 세월동안 가로막혀있는 군사분계선을 두루미와 기러기들은 오늘도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
민통선 초소를 나와 마을회관 앞으로 이동해 방문자센터와 마을역사를 전시한 ‘사라진 마을 김화이야기관’을 둘러보며 생창리 DMZ생태평화공원 탐방을 마무리한다.
2월, 임진강 두루미 만나러 파주로!
일정의 마지막 행선지는 철원, 하면 떠오르는 또하나의 경관인 철원노동당사 건물이다. 1946년 지어진 이 건물은 철원지역에서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살아남은 유일한 건물이다. 반공 의식이 강조됐던 80년대까지 ‘공산당이 주민을 착취했던 현장’으로만 치부됐던 노동당사는 1994년 서태지와아이들 3집의 타이틀곡인 ‘발해를 꿈꾸며’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며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고,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상징건물이 됐다.
노동당사 건너편에는 한국전쟁 이전에 번성했었던 과거 철원시내의 모습을 재연해놓은 ‘철원역사문화공원’이 조성돼 있다. 아쉽게도 폐장이 임박한 시간에 도착해 천천히 구경하지는 못하고 따끈한 차 한잔을 나누는 것으로 일정을 마무리했다. 짧은 겨울해가 아쉬웠다.
연천과 철원에 이어 파주 일대의 생태와 역사를 둘러보게 될 ‘두루미의 땅, DMZ를 걷다’ 3회차 프로그램은 2월 15일 토요일에 진행된다. 1월에는 철원 한탄강변 두루미들을 만났으니, 다음달에는 파주 임진강변의 두루미들도 만나봐야겠다. 고양신문 DMZ생태평화기행 관련 문의 010-5386-9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