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고양시 총선·국회의원 톺아보기②
▶1985년 12대 총선 ▶1988년 13대 총선

❚제12대 총선(1985년) - 이용호(민정당, 초선) 이영준(민한당, 초선) 

‘독재정권 심판’ 열기, 신민당 거센 돌풍
하지만 고양·파주 표심만은 요지부동
당도 인물도 4년 전 결과 고스란히 재연 

[고양신문] 전두환 신군부 정권은 국민을 이중적으로 대했다. 정치·사회적으로는 강력한 통제와 억압으로 저항의 목소리를 억눌렀고, 문화적으로는 이른바 ‘3S(스포츠·스크린·섹스)’ 정책을 들이밀며 대중들의 정치적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마침 국제적 호경기와 맞물려 경제·문화적 자유의 확장을 본 대중의 마음속에서는 정치·사회적 자유에 대한 욕구도 거침없이 팽창했다. 이는 1985년  치러진 12대 총선이라는 분기점을 맞아 ‘신군부 독재정권, 선거로 심판하자’는 열기로 확산됐다.

1985년 치러진 12대 총선에서는 합동유세장마다 엄청난 청중이 모여들어 정권심판의 뜨거운 열기를 분출했다.  
1985년 치러진 12대 총선에서는 합동유세장마다 엄청난 청중이 모여들어 정권심판의 뜨거운 열기를 분출했다.  

대도시 유권자들을 중심으로 ‘5월 광주’ 진상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수많은 군중이 몰려든 유세장에서는 그동안 금지됐던 언어들이 뜨겁게 분출했다. 해외로 망명했던, 민주화투쟁의 상징적 인물인 김대중이 선거를 며칠 앞두고 귀국한다는 소식도 불붙는 민심의 도화선이 됐다.  

11대와 동일한 제도로 치러진 12대 선거에서 기존 정당의 구도는 여당 민정당, 야당 민한당·국민당이 그대로 유지됐지만, 태풍의 핵은 ‘진짜 야당’의 귀환을 자처한 신한민주당(신민당)이었다. 활동이 금지됐던 정치인들이 차례차례 해금돼 김영삼·김대중의 이름을 아우른 신민당 깃발 아래 모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관제야당으로 불렸던 민한당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일부 후보들은 ‘1등 신민당, 2등 민한당’이라는 궁색한 구호를 호소하기도 했고, 아예 신민당으로 당적을 옮기려는 움직임도 이어졌다. 

12대 총선에서 함께 손잡고 신민당 돌풍을 이끌어낸 김대중과 김영삼. 하지만 이들은 2년 뒤 치러진 직선제 대통령선거에서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며 정권교체에 실패했다.  
12대 총선에서 함께 손잡고 신민당 돌풍을 이끌어낸 김대중과 김영삼. 하지만 이들은 2년 뒤 치러진 직선제 대통령선거에서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며 정권교체에 실패했다.  

개표 결과 여당에 절대 유리한 선거제도(중선거구+제1당 전국구 3분의 2 독식) 덕분에 민정당은 과반을 한참 넘는 148석을 차지하며 1당 자리를 지켰지만, 사실상의 승자는 신민당이었다. ‘여촌야도(與村野都)’라는 말이 보여주듯 대도시를 중심으로 67석을 획득해 35석과 20석을 얻는 데 그친 민한당·국민당을 제치고 단숨에 제1야당으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창당 25일 만에 이룬 깜짝 놀랄 성과였다. 이후 민한당·무소속 의원들을 대거 흡수하며 신민당은 103석의 거대야당이 된다.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개헌운동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린 것도 바로 12대 총선부터였다.

신민당의 거센 돌풍은 수도권 전체를 강타했다. 고양·파주를 둘러싼 인근 지자체 선거구의 결과를 살펴봐도 서대문·은평(김재광), 강서(김영배), 부천·김포·강화(안동선), 의정부·동두천·양주(김형광) 등 모든 선거구에서 신민당 후보들이 독보적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고양·파주 유권자들의 선택만은 별개였다. 민정당 이용호, 민한당 이영준 의원이 11대와 마찬가지로 사이좋게 1·2위를 나눠 가지며 재선에 성공했다. 반면 ‘민중과 함께 민주화시대 열자’는 구호를 내걸고 출마한 신민당 황인형 후보는 최하위(4위)에 그쳤다. 접경지역 특유의 보수적 성향이 80년대 중반까지도 여전히 강고했음을 알 수 있다. 

4년 전 3위로 밀렸던 국민당 이택석 후보는 이번에도 3위로 고배를 마셨지만, 2위와의 표차를 대폭 줄이며 선전했다. 특히 연고지인 고양에서는 당당히 1위를 차지했지만, 결과적으로 고양의 투표율이 파주에 비해 현저히 낮았던 게 뼈아팠다. ‘여기저기 보아도 믿을 놈은 이택석’이라는, 당시 유권자들의 순박한 정서를 겨냥한 구호가 재미있다. 

이용호 의원은 “초선의원으로 활동하며 차원 높은 의정활동을 수행했다”고 자평하며 ‘나라안정 다진 일꾼 다시 밀어 번영하자’는 구호를 내걸고 선거에 임했다. 고양과 관련된 공약으로는 △삼송~원당 4차선도로 확장 △경의선 철도변 재개발 △서울시내버스 유치 △고양군민회관 건립 △행주산성 성역화 개발 △신도·화전 공설시장 개설 등 촘촘한 지역맞춤 공약들을 제시했다. 80년대 중반 고양군이 군민회관 하나 없고, 삼송~원당 간선도로가 편도 1차선인 ‘시골마을’이었다는 사실을 방증해준다. 

이에 반해 11대 국회에서 88올림픽지원특위에서 활동한 이영준 의원은 “민주헌법 개정, 대통령직선제 도입, 일당독재와 부정부패 청산”과 같은 정치적 구호를 내걸고 12대 총선을 치렀다. 공약 역시 △국정감사권 부활 △부유세 신설 △부동산투기방지법 제정 △공직자재산공개 등 포괄적인 의제들로 채워졌다. 

이영준 의원은 12대 당선 후 민한당을 탈당하고 신민당으로 입당해 이후 범 김영삼계로 정치활동을 이어갔고, 1987년 김영삼·김대중계가 신민당을 탈당해 창당한 통일민주당에 합류했다. 


❚제13대 총선(1988년) - 이택석(신민주공화당, 초선) 

87체제 첫 총선, 양김 앞세워 ‘여소야대’  
소선거구제 부활, 고양군 독자 선거구로 
‘토박이’ 이택석, 3번째 도전 끝에 당선 

13대 총선은 앞선 총선 3년 만인 1988년에 치러졌다. 그사이 많은 것이 바뀌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6·29선언-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이 숨가쁘게 이어지며 제도적 민주주의가 성취됐고, 이어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을 포함한 4자 구도로 치러진 대선에서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1987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노태우 후보. 
1987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노태우 후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이른바 ‘87체제’에서 치러진 첫 총선이었던 13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2명의 당선인을 뽑는 중선거구에서 1명을 뽑는 소선거구로 바뀌었고, 국회의원 숫자도 299명으로 늘었다. 후보의 기호 순서 역시 추첨제에서 원내 의석 순으로 바뀌었다. 시각적으로는 13대부터 총선 포스터가 컬러로 바뀌었다. 이러한 제도는 전국구(이후 비례대표) 의석의 선출·배분방식 외에는 36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큰 틀에서 유지되고 있다. 

1987년 대선에서 민주화운동 진영은 김영삼-김대중의 분열로 정권교체 기회를 놓쳤는데, 총선에서도 역시 단일화에 실패했다. 결국 통일민주당(김영삼), 평화민주당(김대중), 신민주공화당(김종필) 등 3개의 야당이 여당인 민정당과 함께 4자가 격돌하는 총선에 돌입했다.

개표 결과, 대도시권 외 지역에서 여전히 강세를 유지한 민정당이 125석을 차지하며 1당이 됐지만, 과반의석에는 턱없이 못미쳤다. 야당의 의석을 모두 합치면 174석,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소야대’ 국회가 탄생한 것이다. 

헌정사상 첫 '여소야대' 구도를 만들어낸 1988년 야 3당. 각각 3김(김영삼 통일민주당, 김대중 평화민주당, 김종필 신민주공화당)이 당의 간판이었다.  
헌정사상 첫 '여소야대' 구도를 만들어낸 1988년 야 3당. 각각 3김(김영삼 통일민주당, 김대중 평화민주당, 김종필 신민주공화당)이 당의 간판이었다.  

13대 총선 특징을 하나 더 짚자면, 이후 대한민국의 정치 지형으로 고착된 지역구도가 선명히 드러난 첫 총선이었다는 점이다. 평민당은 호남지역을 싹쓸이했고, 통일민주당은 부산지역을 석권했고, 신민주공화당은 충청지역에서 선전했다. 대구·경북·강원은 말할 것 없이 민정당의 강세였다.       

오래간만에 부활한 소선거구제로 고양군 역시 단일선거구로 총선을 맞았다. 당시 고양군 인구는 24만 명, 유권자는 13만 명이었다. 오랫동안 파주, 또는 김포와 묶여 기를 펴지 못했던 고양의 표심은 지역 출신으로 세 번째 도전에 나선 신민주공화당 이택석 후보에게 몰렸다. 5명이 경쟁을 펼친 선거에서 50%가 넘는 득표율을 기록한 완승이었다. 민정당 이국헌, 통일민주당 이근진, 평민당 김진택 후보는 각각 2, 3, 4위로 낙선하며 지역 유권자들에게 새롭게 얼굴을 알리는 데 만족해야 했다. 

고양군과 파주군에서 동반 당선되며 신민주공화당 바람을 일으킨 이택석,  최무룡 의원.   
고양군과 파주군에서 동반 당선되며 신민주공화당 바람을 일으킨 이택석,  최무룡 의원.   

이택석 후보와 함께 이웃 동네 파주에서도 신민주공화당 후보가 당선돼 화제를 모았다. 당선인은 ‘대중정치시대 선언!’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앞세워 민정당의 2선 터줏대감 이용호 의원을 꺾은, 인기 영화배우 출신 최무룡(배우 최민수의 부친) 후보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계승자를 자처한 김종필 총재가 진두지휘한 신민주공화당의 정체성이 고양·파주 유권자들의 성향, 그리고 후보들의 화제성과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앞선 총선에서 두 번이나 낙선했던 이택석 후보의 구호는 ‘이번만은 이택석!’으로 누구보다도 간결했다. 공보물 내용 역시 △일산초교, 경복중·고, 고려대를 나왔고 △일산읍 주엽리에서 13대째 살아왔고 △고양군 200여 부락을 최하 20번씩 다녀서 누구보다도 마을 사정을 잘 알고 △농민의 고충을 잘 알고 △효행과 경로정신이 투철한 사람이라는 등 당시 유권자들의 토박이 정서에 호소하는 내용들로 채워졌다. 하지만 지역발전 관련 공약은 ‘내 고향 고양군을 모범적인 위성도시로 발전시키겠다는 신념이 굳은 사람’이라는, 다소 막연한 약속이 전부였다.

13대 총선에서 얼굴을 알린 민정당 이국헌, 통일민주당 이근진, 평화민주당 김진택 후보. 이국헌 후보와 이근진 후보는 이후 국회 입성에 성공한다. 

지역발전에 대한 구상은 오히려 낙선자들의 공약에서 풍성하게 제시됐다. 대검 부장검사 출신인 민정당 이국헌 후보는 “원당읍을 시작으로 일산·지도·신도·벽제·화전읍을 차례로 시로 승격시키자”고 제안했고 △지하철 고양군 연장 △ 그린벨트·군사보호지역 규제 완화 등 숙원사업을 언급하기도 했다. 고양군 학우회장을 지낸 기업인 출신인 통일민주당 이근진 후보도 △농촌 마을 뒤안길까지 말끔히 아스팔트로 포장 △그린벨트법안 반드시 폐지 또는 개선 △고양군 전역 상수도시설 확충을 약속했다. 

사상 초유의 ‘여소야대’ 구도를 토대로 야권은 광주특위, 5공비리특위 등을 밀어붙이며 13대 의정을 주도했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1990년 1월, 민정당과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이른바 보수대연합을 기치로 ‘3당 합당’이라는 전무후무한 정계개편을 전격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초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민자당)이 만들어졌고, 이택석 의원도 당연히 김종필 총재를 따라 민자당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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