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고양시 국회의원총선 톺아보기③
▶1992년, 제14대 총선

3당 합당으로 초거대여당 ‘민자당’ 탄생
정주영 ‘통일국민당’도 제3지대 바람몰이
여당으로 변신한 이택석 의원 ‘재선’ 성공
화정·행신·탄현… 성급한 택지개발 이어져 

1992년,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김종필 총재가 보수대연합을 기치로 '3당 합당'을 선언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한국 정치사상 가장 파격적인 정계개편이었다. 
1992년,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김종필 총재가 보수대연합을 기치로 '3당 합당'을 선언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한국 정치사상 가장 파격적인 정계개편이었다. 

[고양신문] 1988년 13대 총선과 1992년 14대 총선 사이에 대한민국 정치 지도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1990년 1월, 여당인 민정당(노태우 대통령)과 제2·제3야당인 통일민주당(김영삼), 신민주공화당(김종필)이 ‘보수대연합’이라는 명분으로 통합을 선언했다. 무려 218개 의석을 보유한 초거대여당 민주자유당(민자당)이 탄생한 것.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로 돌변한 사상초유의 정계개편을 통해 여권은 호남 지역을 제외한 전국적 기반 확보에 성공했다.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은 3당 합당을 거부한 통일민주당 잔류진영(이기택, 노무현, 김광일, 김정길 등)이 꾸린 일명 꼬마민주당과 합당하며 ‘민주당’이라는 심플한 이름으로 92년 총선에 나섰다. 민주당이라는 이름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던 김영삼이 여권 합류를 선택한 덕에 당명 선택만큼은 자유로워진 셈이다. 

1992년 총선에서는 현대그룹 총수 정주영 회장이 창당한 '통일국민당'이 화제를 모으며 31석을 얻는 바람을 일으켰다.  
1992년 총선에서는 현대그룹 총수 정주영 회장이 창당한 '통일국민당'이 화제를 모으며 31석을 얻는 바람을 일으켰다.  

여기에 이른바 ‘제3지대’의 원조 격인 새로운 정당이 경쟁에 가세했다. 바로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창당한 통일국민당이다. 신군부정권의 정치후원금 강탈에 신물이 난 정 회장은 언론사와 정당을 직접 만든 후 연일 정권을 향한 비난과 폭로를 쏟아냈다. 선거전에 돌입해서는 ‘반값아파트 공급’ 등의 솔깃한 공약을 내걸고 코미디언 이주일, 탤런트 강부자 등 유명 연예인들을 앞세워 바람몰이를 하며 기존 정치권을 긴장케 했다.   

선거 결과 민자당은 제1당의 자리를 지켰지만, 의석이 무려 69석이나 날아가 149석으로 내려앉았다. 민주당은 호남의 강고한 지지와 서울·경기의 선전으로 97석을 얻었다. 최대 승자는 신생정당 통일국민당으로, 목표로 잡았던 교섭단체 확보선을 훌쩍 뛰어넘어 31석을 얻는 바람을 일으켰다. 

군 부정선거를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는 육군 9사단 장교 이지문 중위. 
군 부정선거를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는 육군 9사단 장교 이지문 중위. 

1992년 총선을 되돌아보며 고양과 연관된 기억 두 개를 소환해보자. 선거를 앞둔 민심이 녹록지 않다는 걸 느낀 민자당은 거대여당 이점을 앞세워 지역마다 장밋빛 공약들을 쏟아냈다. 그중 하나가 고양·파주·연천을 포함하는 ‘경기북부 종합개발 검토’였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 기조와 맞물려 ‘북방개발·평화경제’라는 말이 처음 거론된 시점도 그 무렵이었다. 

또 하나는 육군 장교 이지문 중위가 군대 내 부정선거를 폭로하는 양심선언을 했는데, 그가 몸담고 있던 부대가 바로 고양에 자리한 9사단이었다.

14대 총선 무렵은 고양도 커다란 변화가 시작되던 시기였다. 1989년 1기신도시 개발계획이 발표되며 접경 배후 농촌지역이었던 고양은 하루아침에 경기북부 최대의 주거단지로 탈바꿈하고 있었고, 총선 직전인 1992년 2월 1일 고양군이 고양시로 승격했다. 

하지만 아직 신도시 입주가 시작되기 전이라 인구는 26만, 선거구도 여전히 하나였다. 급격한 변화에 대한 기대감과 불안감이 공존하는 상황에서 선거가 치러졌고, 결과는 지역구 현역인 민자당 이택석 의원이 다시 한 번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았다. 반면 앞선 선거에서 민정당 소속으로 2위를 했던 이국헌 후보는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 공천에서 이택석 의원에게 밀리자 무소속 출마를 강행했지만 3위에 그치고 말았다. 

당 통합 과정에서 신민주공화당 측 추진위원으로 활동했던 이택석 의원은 통합 이후 14대 총선 당시 민자당 원내 부총무를 맡고 있었다. 총선에 임한 구호도 ‘나라엔 큰 희망, 고장엔 큰 번영’으로, 토박이 정서에 호소했던 13대 선거에 비해 훨씬 여유를 갖췄다. 또한 선거공보물에도 ‘통일시대를 맞이할 신도시, 쾌적한 주거환경을 가진 전원도시’와 같은 비전이 제시됐다. 공약을 통해서는 △그린벨트 완화 △주거환경 개선 △신도시 개발지역 각종 민원 해결 △영세민장애자 위한 사회복지시설 확충 등을 약속했다. 

1989년 고양신문 창간호 1면에 실린 사진. 트렉터와 경운기를 몰고 나온 농촌마을 주민들이 일산신도시 토지수용에 강력히 반발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1989년 고양신문 창간호 1면에 실린 사진. 트렉터와 경운기를 몰고 나온 농촌마을 주민들이 일산신도시 토지수용에 강력히 반발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1기 신도시 발표 초기, 이택석 의원은 토지수용에 강하게 반발하는 원주민들의 입장을 대변하기도 했다. 하지만 주민반발이 가라앉은 후 일산신도시 건설은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이어 화정, 성사, 능곡, 중산, 탄현지구 등 대규모 택지개발이 줄줄이 착공됐다. 이 과정에서 도시의 자족기능 확보를 위한 이택석 의원의 역할이 부족했다는 평가도 있다. 

2위는 또 한 명의 고양 출신 국회의원인, 민주당 소속 전국구 초선의원 이교성 후보였다. 이 의원은 보수진영 후보가 양분된 상황이 본인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리라는 기대감을 가졌지만, 4년 동안 지역기반을 탄탄히 다진 이택석 의원에게 4700여 표차로 고배를 마셨다. 이교성 의원의 구호는 당시 정계구도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통합야당 밀어주어 일당독주 막아내자!’였다.

벽제동 출신으로 고양초·중, 연세대 철학과를 나와 고양군청년동지회를 이끌었던 이교성 후보는 34살의 젊은 나이에 민주통일당 후보로 제9대 총선(1973년)에 출마하며 정계에 발을 들였다. 이후 민추협, 평민당, 통합민주당 등 정통야당의 자리를 지켜온 그는 ‘늘 넉넉한 우리동네 뚝배기’를 자처했다. 

14대 총선에서 낙선한 이교성(민주당), 최성권(신정당)
14대 총선에서 낙선한 이교성(민주당), 최성권(신정당), 이국헌(민정당) 후보의 선거 벽보. 

낙선한 후보들의 지역공약을 살펴보면, 이교성 후보는 △고양시 전역 서울전화 편입 △시내버스 신설로 상쾌한 출퇴근 보장 △농산물·화훼 직거래장 신설 △인문고 유치 △시립도서관 및 청소년문화센터 건립 등이었다. 90년대 초반까지도 인문계 고교가 없었다니, 여전히 고양의 도시인프라는 낙후성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이국헌 후보의 경우도 유사했다. 다만 이국헌 후보는 유난히 ‘종합’을 강조해서 △종합체육운동장 △종합체육관 △종합청년회관 △종합시장 △종합여성회관 등을 길게 나열했다. 

1992년은 선거가 2개나 치러진 해였다. 3월 총선에 이어 12월에는 14대 대선이 치러졌고, 민자당 김영삼 후보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대선에서 3번째 낙선한 김대중 후보는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그 약속은 번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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