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북부 석조 예배당 순례 ④ 고양 신도제일교회 구성전
한국전쟁 직후부터 70년 지축동 언덕 지켜
고등공민학교·유치원 운영, 사회적 소명 최선
오랜 이야기 품은 예배당, 지역공동체의 자산
[고양신문] 포천, 김포, 의정부, 파주 등 경기북부 지역에 산재한 석조 예배당 순례의 종착점에 다다랐다.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장고개에서 싸릿말로 넘어가는 언덕 위에는 둥글둥글한 호박돌로 지은 아름다운 예배당이 70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바로 옆에는 공사가 마무리되어가는 새 예배당이 들어서서 교인들은 돌 예배당을 신도제일교회 구성전, 또는 옛성전으로 부른다.
미군 공병부대장의 헌신적 도움
대개 오래된 개신교 교회들은 그 지역의 지명을 따 ‘00제일교회’라는 이름을 붙인 곳이 많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신도제일교회도 그 경우다. 지금의 고양시 동부와 은평구 서부를 아우르고 있던 옛 ‘고양군 신도읍’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감리교회라는 사실을 이름이 방증해준다.
교회 역사는 해방 직후인 1945년 시작됐다. 1949년에는 10평 규모의 소박한 초가 예배당을 짓지만 한국전쟁을 겪으며 허물어지고 만다. 하지만 전선이 교착상태로 접어들자 교인들은 또다시 팔을 걷어붙이고 흙벽돌에 초가를 얹은 15평 예배당을 짓고 전쟁의 참상을 겪은 이웃들의 안식처를 만든다. 아울러 신도고등공민학교를 시작해 배움에 주린 이들을 불러모은다.
아무것도 없는 밑바닥에서 희망의 출발점을 만들려는 노력은 낯선 이방인의 마음에도 감동으로 전해졌다. 인근 오금리 언덕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공병부대장 헤롤드 비티 중령이 주일마다 초가 예배당을 찾았고, 물자와 인력을 지원해 1954년 104평의 석조 예배당을 건축했다. 당시를 기억하는 교회의 원로들은 겸손한 모습으로 교회 건축에 헌신한 비티 중령을 “하나님이 보내주신, 군복을 입은 천사 같았다”고 기억한다. 비티 중령의 이름은 예배당 전면부 머릿돌에 소중하게 새겨져 있다.
준2층 석조건물의 고유한 조형미
예배당은 화강석과 시멘트를 사용해 조적방식으로 벽체를 쌓았다는 점에서 전체적으로 앞서 살펴 본 4곳 석조성당과 유사하지만, 차이점도 분명하다. 앞선 성당들은 평면을 십자가형으로 설계하는 가톨릭 건축의 특성을 따라 종탑과 제단 뒤쪽을 돌출형으로 설계했지만, 신도제일교회 구성전은 네모난 박스형으로 단순화했다. 장식적 요소를 최소화한 전형적인 개신교 스타일이다.
또 하나는 성당들이 단층구조인데 반해 신도제일교회 구성전은 반지하를 둔 준2층 건물로 지었다. 덕분에 정면에는 아름다운 돌계단이 놓여졌고, 측면에는 상·하 2열의 창이 펼쳐졌고, 높게 솟은 삼각종탑을 정점으로 건물 전체에 수직적 상승감이 부여됐다. 다른 곳과는 차별화된, 신도제일교회 구성전만의 고유한 조형미가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 손으로 지은 돌 예배당”
또 다른 특징은 벽체를 채우고 있는 둥근 호박돌이다. 앞서 살펴본 석조성당들이 커다란 화강암을 사각형 돌덩이로 다듬어 사용한 것과 달리, 신도제일교회 구성전은 교회에서 멀지 않은 창릉천 시냇가에서 주워온 둥글둥글한 호박돌을 교인들과 마을 주민들이 직접 옮겨 충당했다.
자연석 그대로의 굴곡을 지닌 돌덩이들은 태양광의 각도에 따라 다채로운 질감을 보여준다. 자세히 살펴보면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갈수록 돌의 크기가 작아지도록 쌓아 안정감을 더했고, 면과 면이 만나는 코너와 창호에는 사람 손으로 다듬은 석재를 사용해 구조적 기능성을 맡겼다. 교우들은 “하나님이 다듬어주신 돌을 교인들 손으로 날라 지은 예배당”이라는 자부심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지금 이곳에 꼭 필요한 예배당
오늘날 지축지구는 고양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신축 아파트단지의 하나로 변모했지만, 이전에는 비닐하우스가 가득한, 서울 경계지역 바깥의 빈한한 변두리 마을이었다. 그린벨트와 군사보호지역으로 꽁꽁 묶이며 오랜 시간 개발에서 소외됐기 때문이다. 그 시절 신도제일교회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마을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앞서 말했듯 무지와 가난을 벗어나고자 하는 이들의 둥지 역할을 한 신도고등공민학교는 1970년 폐교할 때까지 450명에 달하는 졸업생을 배출했다.
교회 공간에서는 모든 세대가 어우러졌다. 신도유치원을 운영할 때는 돌 예배당 앞 놀이터를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었고, 매년 5월 흥겨운 마을 경로잔치가 열렸던 장소도 교회의 잔디마당이었다.
또한 변변한 문화공간이 전무했던 시절이라 마을의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이 뭔가를 궁리하려면 늘 교회에서 만나야 했다. 때문에 그 시절 지축동에서 자란 이들은 교회 돌 예배당에서 형들로부터 기타를 배우고, 마당에서 공을 차고, 대보름날 쥐불놀이를 하고, 여름밤 모닥불에 감자를 굽고, 반지하 독서실에서 공부를 핑계로 수다를 떨며 밤을 지새웠던 추억을 저마다 마음 한구석에 간직하고 있다.
신도제일교회는 오래도록 ‘지금 이곳에 꼭 필요한 교회’를 표어로 삼고 있다. 유영종 담임목사는 “성장만을 추구하는 교회 중심의 신앙에 머물지 말고, 초기 성도들이 그랬듯 지역과 이웃들을 위해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공동체를 추구하자는 다짐”이라고 설명했다.
고양 시민사회 태동기 지켜봐
일반적인 교회사와는 결이 조금 다른 얘기지만, 신도제일교회는 고양시 시민사회 역사에도 작은 족적을 남긴다. 2년 전 소천한 유재덕 목사가 20년 넘는 세월 동안 신도제일교회 담임을 역임했기 때문이다. 민주화와 인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뜨겁게 분출했던 80년대 후반 고양지역에서도 주체적 시민활동이 싹트기 시작했는데, 그 시절 개신교계를 대표했던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유재덕 목사다.
그가 경기북부 인권위원회, 고양시민회, 고양환경운동연합, 월드비전 고양지회, 고양YMCA 등의 창립에 두루 참여했던 까닭에 고양지역 초기 시민사회 활동가들이 신도제일교회 돌 예배당에서 이런 저런 모임을 갖곤 했던 것이다.
고양고등학교 옛 강당 ‘닮은꼴’
신도제일교회 구성전과 함께 살펴보면 좋을 건물이 있다. 바로 삼송동에 자리한 고양고등학교 구 대강당(차오름관)이다. 이 건물 역시 신도제일교회 구성전을 지원한 미 공병부대 비티 중령의 도움으로 자어졌기 때문이다. 가까이에서 보면 호박돌을 사용한 두 건물의 벽체 조적방식이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양고등학교 구 대강당은 2021년 고양시 상징건축물로 지정됐다.
14년 만에 지축으로 되돌아와
근현대 건물들을 위협하는 가장 큰 외부요인은 바로 재개발이다. 신도제일교회 구성전 역시 2000년대 중반 지축지구 재개발이 발표되며 보존을 장담할 수 없는 위기에 봉착했다. 다행히 예배당이 터 잡고 있는 언덕을 기준으로 수용지구의 경계선이 그어지며 예배당을 지켜낼 수 있는 선택지가 생겼다. 이 과정에서 경제적 합리성만을 추구했다면 구성전을 보상금과 맞바꿀 수도 있었지만, 신도제일교회 교인들은 주저 없이 구성전 보존을 선택했다. 임시로 교회를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가, 주변 개발이 마무리된 후 새 성전을 짓고 돌아오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지축지구 개발이 예상보다 많이 늦어지며 늦어도 5년 안에는 돌아오리라는 약속은 한정 없이 미뤄졌다. 그렇게 2010년 일산으로 교회를 옮겼던 신도제일교회는 고향을 떠난 지 14년 만에 비로소 다시 지축동 언덕으로 되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다.
오랜 역사와 이야기를 품은 예배당은 비단 교인들만의 것이 아니라, 지역공동체 모두의 소중한 자산이다. 지축동처럼 과거의 풍경과 흔적들이 한꺼번에 사라져버린 마을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건축가와 문화재 전문가들은 신도제일교회 구성전도 앞서 살펴본 경기북부 석조성당들과 마찬가지로 문화재 등재 가치가 충분하다고 평가한다. 문화재로 등재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해결과제가 남아있다는데, 옛 터전으로 돌아온 성도들이 또다시 지혜를 모으리라 기대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