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개의 키워드로 열어가는 '고양 역사이야기'⑤

아주 옛날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의 이름은 ‘고양시(高陽市)’다. 그르면 ‘고양시’는 옛날에는 뭐라 불렸으며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밝혀진 내용을 놓고 보면 우리 지역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최소한 7만 년 전 이전이다. 일산신도시와 덕이동, 탄현동 등에서 발견된 구석기와 2018년 서울~문산 간 고속도로 흥도 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발견된 (가칭)‘구석기 공장’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특히 ‘구석기 공장’의 존재는 우리 고양시가 아주 옛날부터 문화의 중심지였음을 알려주는 확실한 유적이다. 또한 일산신도시 문화재 발굴과정에서 발견된 ‘가와지볍씨’는 재배볍씨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란은 있으나 오천년 이전부터 우리지역에서 정착(농경)생활이 시작되었다는 증거물의 하나이다. 

1. 일산신도시 문화재 발굴현장. 사진=고양가와지볍씨박물관 제공
1. 일산신도시 문화재 발굴현장. 사진=고양가와지볍씨박물관 제공
가와지볍씨와 가와지쌀 – 일산신도시 개발과정에서 발견된 5020년 전의 우리나라 최초의 재배볍씨가 싹을 튀어 고양시의 대표 브랜드상품으로 부활하였다. 사진=고양가와지볍씨박물관, 고양시농업기술센터 제공
가와지볍씨와 가와지쌀 – 일산신도시 개발과정에서 발견된 5020년 전의 우리나라 최초의 재배볍씨가 싹을 튀어 고양시의 대표 브랜드상품으로 부활하였다. 사진=고양가와지볍씨박물관, 고양시농업기술센터 제공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를 지나 청동기시대에 대한 유적은 다소 부족한 편이다. 덕양구 화정동 국사봉에서 지석묘군(支石墓群, 고인돌,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56호)과 인근 도내동에서 청동기 시대 후기 주거지가 발견되었지만 존재감은 낮은 편이다. 이들은 인접한 파주시 교하, 월롱의 유적들과 함께 고조선 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1. 고양시 화정동 국사봉 고인돌 – 수도권 전철 3호선 원당역에서 행주누리길을 타고 국사봉 쪽으로 20분 정도 오르면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된 지석묘군(고인돌)이 있다. 사진=고양시 문화예술과 제공
1. 고양시 화정동 국사봉 고인돌 – 수도권 전철 3호선 원당역에서 행주누리길을 타고 국사봉 쪽으로 20분 정도 오르면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된 지석묘군(고인돌)이 있다. 사진=고양시 문화예술과 제공

 역사(기록)에 등장하는 고양시
  고양시가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다. 물론 그때의 지명은 고양은 아니었다. 백제의 도읍지로 추정되는 위례성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 삼국이 형성되는 기원전 1세기 전후에는 백제의 영토로 출발했을 것이다. 이후 삼국이 정립되고 고구려의 남진정책이 본격화하는 5세기 중반에서 6세기 전반, 장수왕, 문자왕, 안장왕 대에 이르면 80여 년간 고구려의 영토에 귀속된다. 고양시 지역이 기록에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때부터 이다. 고려시대 김부식 등에 의해 편찬된 『삼국사기』(1145)에 의하면 지금의 일산지역에는 <달을성현(達乙省顯)>, 덕양(행주)지역에는 <개백현(皆伯顯)>이 설치되었다. 또한 지금의 서울지방에는 북한산군을 설치하고 달을성현, 개백현 등의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백제와 신라를 공략했다. 

  고구려의 남진에 위기의식을 느낀 백제와 신라는 나․제 동맹(433)을 맺고 공동대응을 하게 되는데 551년에는 양국이 연합군을 편성하여 한강유역을 되찾게 된다. 이때 고양지역은 다시 백제의 영토로 편입된다. 그런데 2년 후인 553년 신라의 진흥왕은 동맹을 파기하고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하류를 점령하여 향후 중국교류와 삼국통일의 거점으로 삼는다. 추사 김정희에 의해 발견된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에 이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로서 고양지역은 처음으로 신라의 영토에 속하게 되고 이러한 상태로 통일 기까지 이어진다. 

  통일 기 초반 고양시는 신라가 구 고구려 영토에 설치한 한산주(漢山州)에 속하게 되는데 당시는 당(唐)․발해(渤海)와 계속해서 영토 분쟁이 이어져 군사도시로서 행정체계가 불안정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후 경덕왕 때 지방행정 구역을 개편하면서 한산주를 한주(漢州)로 바꾸고 고양시, 양주시, 서울 일대에 한양군(漢陽郡)을 설치한다. 한양군의 하위 행정단위로 우왕현(遇王縣)을 두었는데 이를 풀이하면 ‘왕을 만난 곳’으로 <한씨미녀와 안장왕>의 설화가 전해지는 개백현(현 덕양, 행주지역)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함께 한양군 서쪽에 교하군(交河郡)을 설치하였는데 그 하위로 고구려의 달을성현을 고봉현(高峰縣)으로 개칭하여 예속시켰다. 이를 정리해 보면 통일신라 시기 고양시 지역은 한양군의 우왕현과 교하군의 고봉현으로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눈에 띄는 내용을 정리해 보면 태조 23년(940)에 행정구역을 재편성하면서 우왕현을 ‘행주’로 개칭하였으며 별칭으로 덕양이라 하였다. 드디어 우리에게 익숙한 행주, 덕양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교하군 고봉현은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고양시 지역은 수도인 개경 인근지역으로 수도 배후도시로 기능하였고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외적 침입에 따른 후방 피난지이다. 『고려사』에 보이는 <한양산성(중흥산성)>이 그것이다. 지금의 북한산성으로 보이며 현종 원년(1010)과 9년(1018), 거란이 침입했을 때 태조의 재궁(梓宮-왕이나 왕비의 관)을 북한산 향림사로 옮겨 안치했으며 국가 위기 시 왕족들이 한양산성으로 피신한 기록이 보인다. 

  ‘고양(高陽)’, 드디어 세상에 나오다
 “改高峰縣爲高陽縣。 高峰屬縣幸州之人上書曰: "幸州, 昔爲德陽縣, 而高峰乃屬縣也。 自合屬後, 官號只稱高峰, 而德陽反爲屬縣, 又無稱號, 非他合屬之例。 請改之。”
  <고봉현을 고쳐 고양현으로 하였다. 고봉 속현 행주 사람이 상서(上書)하였다. "행주는 예전에 덕양현이 되었고 고봉은 속현이었는데, 합속(合屬)한 뒤로는 관에서 부르기를, 단지 고봉이라 하여, 덕양이 도리어 속현이 되고 또 칭호도 없어서 다른 합속한 예와 다르니, 청컨대, 이를 고치소서”>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25권」, 태종 13년 3월 23일,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췌)

  조선태종 13년(1413) 3월 23일, 행주 사람의 상서를 받아들여 고봉의 “고”자와 덕양의 “양”자를 합쳐 “고양현”이라 함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고양”이 드디어 탄생하였다. 이후 고양현은 성종 2년(1471) 10월 13일, 지금의 덕양구 용두동에 경릉(덕종과 소혜왕후의 릉)과 창릉(예종과 안순왕후의 릉)의 두 릉이 있어 현(縣, 縣令은 5품관)에서 군(郡, 郡守는 4품관)으로 승격하여 고양군이 되었다. 수도 한양 서북쪽의 배후도시로 발전하던 고양군은 일제강점기, 분단을 거치며 침체기를 겪다가 군으로 승격된 지 521년 만인 1992년 2월 1일 전국에서 최초로 군 전체가 시로 승격되어 고양시가 되었다. 시 승격 이후에는 일산신도시 건설 등 급격한 택지개발이 이어지며 지금은 인구 110만의 특례시가 되었다. 

  지난 2013년은 “고양”이 600살이 되는 해였다. 고양시는 <고양600년 기념사업>을 펼치며 고양시민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되새겼다. <600년 기념관>을 개관하여 고양역사의 자랑스러움을 전시하였으며 영사정(永思亭, 덕양구 대자동, 조선후기 건축물), 산영루(山映樓, 덕양구 북한동, 조선시대의 누각)등 소중한 문화유산을 복원하였다. 이밖에도 역사강연, 답사, 전통문화 공연, 기념식 등 다양한 이벤트를 통해 역사문화 도시, 고양시의 우수성을 대내․외에 과시한 바 있다. 

  너무나 아쉬운 것은 이러한 자부심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시민들의 큰 바람인 역사박물관 건립과 같은 굵직한 성과물로 나타났어야 하는 건데 이벤트로만 그쳐 용두사미(龍頭蛇尾)가 되고 말았다. 그나마 학생들이 즐겨 찾던 <600년 기념관>마저도 근래에 <예술인 창작센터>로 기능이 바뀌고 말았다. 게다가 역사교육, 향토문화 진흥 사업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이 점차 사라져 가고 있으며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서울의 베드타운으로 전락하면서 서서히 ‘고양성(高陽性)’이 소멸되어 가고 있는 위기의식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이번엔 ‘고양(高陽)’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일련의 과정을 되돌아보면서 600년을 넘게 소중하게 지켜온 우리의 전통과 뿌리인 ‘고양성’의 회복에 대하여 고민해 보았다. 

<고양시가 걸어온 길>
√구석기시대 : 7만 여 년 전부터 사람이 거주 (구석기 제작소)
√신석기시대 : 농경생활, 한반도 최초의 볍씨 발견 (가와지 볍씨)
√청동기시대 : 국사봉 고인돌 (고조선시대)
√삼국시대 
  - 백제영토로 출발
  - 고구려의 달을성현, 개백현 (최초의 기록, 『삼국사기』)
√통일신라시대 : 한양군 우왕현, 교하군 고봉현
√고려시대 : 행주(덕양)현, 고봉현
√조선시대
  - 고양현 (1413년), 고봉의 “고”자와 덕양의 “양”를 따서 “고양”탄생
  - 고양군 (1471년) 
√근․현대 
  - 고양시 승격 : 1992년 2월 1일 (전국 최초로 군지역 전체가 시로 승격)
  - 덕양구, 일산구 설치 : 1996년 3월 1일
  - 일산동구, 일산서구 설치 : 2005년 5월 16일
  - 고양특례시 승격 : 2022년 2월 1일 

<참고자료>
고양시사2역사”, 고양문화원, 2008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s://db.history.go.kr/), 국사편찬위원회
2021년도 고양시 통계연보

윤병열 일산동구도서관 과장  
윤병열 일산동구도서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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