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개의 키워드로 열어가는 <고양 역사이야기>⑥

<연산군 금표비> 세상으로 나오다
  “금표 안으로 들어오는 자는 임금의 명령서를 훼손하는 자를 처벌하는 법률에 따라 참형에 처한다”
   「禁標內犯入者論棄毁制書律處斬」
  
  1984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위치한 금천군(錦川君, 1537~1594, 조선 제9대 왕 성종의 증손자)의 묘역을 정비하던 후손들은 낯선 비석 하나를 발견하고는 다른 석물들과 함께 묘지 앞쪽에 잘 세워놓는다. 이후 10여 년의 시간이 흐른 1995년, 당시 고양문화원 연구원으로서 금석문을 조사하고 있던 정동일 고양시청 문화재전문위원은 그 비석이 금천군과는 관련성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좀더 세부적으로 연구를 하게 된다. 1년 후 그는 이 비석이 『연산군 일기』에 자주 등장하는 금표비(禁標碑)임을 알리는 논문을 발표한다. (「燕山君 禁標碑 硏究 -大慈洞 禁標碑를 中心으로-」, 1996) 

연산군시대 금표비. 국내에서 유일하게 발견된 연산군시대의 금표비이다. 뒤편으로는 연산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왕족들의 무덤이 즐비하여 죽어서도 악연을 사슬을 끊지 못하고 있다. 덕양구 대자동 산 10-1번지.
연산군시대 금표비. 국내에서 유일하게 발견된 연산군시대의 금표비이다. 뒤편으로는 연산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왕족들의 무덤이 즐비하여 죽어서도 악연을 사슬을 끊지 못하고 있다. 덕양구 대자동 산 10-1번지.

 폭정의 시대를 증명하는 또 하나의 실체가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연산군 일기」에 의하면 연산군의 폭정과 황음(荒淫)은 갑자사화(1504)로부터 중종반정(1506)이 일어나는 2년 4개월 동안에 더욱 집중된다. 이 시기에는 자신의 뜻에 반할 경우 신하는 물론 왕족까지 마구잡이로 처형하거나 유배를 보내버린다. 또한 기행(奇行)이 타인에게 보여지는 것이 두려워 궁궐 주변의 민가를 철거시키고 게다가 사냥과 유희를 위해 멀리는 도성 밖 100리 까지 금표를 설치하여 백성들을 삶의 터전에서 쫒아낸다. 연산군 일기의 과장된 표현을 감안하더라도 백성들을 보호해야할 군주가 펼친 암울하고 수치스러운 역사의 한 장면인 것이다. 

  월산대군, 고양에 잠들다
  고양시청이 있는 원당에서 의정부로 가는 국도 39호선(호국로) 낙타고개를 넘어서면 바로 신원동 능골마을에 이른다. 이 마을에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월산대군(月山大君, 李婷, 1454~1488)의 묘와 사당이 좌우로 나뉘어져 위치하고 있다. 도로개설로 인해 두 곳이 나뉜 것이다. 

  월산대군은 세조(수양대군)의 원손(맏손자)으로 정상적이라면 아버지 의경세자(추존왕 덕종)에 이어 조선의 제9대 왕으로 등극할 인물이었다. 그런데 세조가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을 통해 왕위를 찬탈하면서 조카 단종은 물론 많은 신하들을 죽인 것에 대한 죄 값인지 첫째 아들 의경세자와 세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둘째아들 예종(睿宗, 조선의 제8대 왕, 재위 1468~1469)마저도 스무 살의 꽃다운 나이에 요절한다. 예종의 사후 원자 제안대군이 네 살의 어린나이여서 당연히 월산대군이 다음 보위(寶位)를 이을 대상이었다. 그런데 할머니 정희왕후(세조의 비)와 어머니 소혜왕후(덕종의 비, 인수대비)가 월산대군의 건강상태를 문제 삼아 그의 동생인 자을산군(잘산군)을 왕으로 추대한다. 이가 바로 조선 제9대 왕 성종(成宗, 재위 1469~1494)이다. 성종의 장인은 그 유명한 한명회(韓明澮, 1415~1487)이다. 당시 한명회는 수양대군(세조)을 왕으로 만든 1등 공신으로 무소불위의 최고 권력자였다. 결국 월산대군은 권력싸움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월산대군 묘는 왕릉에 못지않는 크기와 석물을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대군묘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월산대군 묘는 왕릉에 못지않는 크기와 석물을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대군묘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연산군시대 간신 임사홍이 쓴 신도비는 재치 있는 상형문자와 수려한 문체를 보여주어 임사홍의 또다른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덕양구 신원동 능골마을
연산군시대 간신 임사홍이 쓴 신도비는 재치 있는 상형문자와 수려한 문체를 보여주어 임사홍의 또다른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덕양구 신원동 능골마을

 왕위 경쟁에서 밀려난 월산대군은 자연 속에 은둔하며 독서와 시문 짓기로 여생을 보내는데 지금의 묘가 있는 고양북촌(신원동 능골마을)에 별장을 짓고 문인들과 교류하며 풍류를 즐긴다. ‘신원동’이라는 지명도 월산대군이 이주하여 자리를 잡은 것에서 유래하였다. 이후 어머니 인수대비의 병환이 깊어지자 지극히 간호하다가 자신도 병이 들어 35세에 세상을 떠난다. 

  월산대군의 묘는 봉분, 묘역, 석물의 크기 등에서 왕릉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규모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 다른 묘들에 비해 두드러지게 다른 점을 두 가지 발견할 수 있다. 먼저 하나는 대부분의 묘역이 동향이나 남향인데 비해 북향을 하고 있다는 점이고, 나머지 하나는 부부 묘일 경우 봉분을 좌우로 나란하게 배치하는 것이 정석인데 부인의 묘가 뒤편에 배치되어 있는 점이다. 전자는 현지의 지형 상 어쩔 수 없었다는 설과 동생인 성종에게 부담이 될까봐 궁궐을 등졌다는 설이 공존한다. 후자의 경우는 부인을 너무 사랑하여 남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뒤쪽으로 숨겼다는 이야기와 자결로써 자신의 삶을 마감한 부인에 대한 유교적 처벌이라는 이야기가 같이 전해진다. 

  연산군, 큰 어머니를 사랑하다?
  연산군의 패륜적 행실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 중에 하나가 큰 어머니 박씨 부인(월산대군의 부인)과의 관계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은 ‘연산군이 큰 어머니인 박씨 부인을 겁탈하여 임신하게 되자 부인이 자결을 하였고 이에 격분한 동생 박원종이 중종반정을 주도하였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야사나 드라마에 종종 등장하는 소재이기도 하고 일정 정도는 정사인 『연산군 일기』에도 나온다. 정사에도 나온다면 사실인 아닌가? 연산군이 희대의 패륜아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친어머니와 다름없는 22살 연상의 여인을 겁탈할 수 있었을까? 

서삼릉 회묘. 연산군의 친모 폐비윤씨는 비록 서러운 삶을 마감했지만 아들로 인해 왕릉에 준하는 화려한 묘지에 잠들어 있다. 사진제공 = 정동일 고양시 문화재전문위원
서삼릉 회묘. 연산군의 친모 폐비윤씨는 비록 서러운 삶을 마감했지만 아들로 인해 왕릉에 준하는 화려한 묘지에 잠들어 있다. 사진제공 = 정동일 고양시 문화재전문위원

 친모가 사사(賜死)된 연산군은 세자시절 몸이 허약하여 종종 큰어머니 집(지금의 덕수궁)에서 지냈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박씨 부인으로부터 어머니와 같은 정을 느꼈을 것으로 추측된다. 왕이 된 연산군은 자신의 세자도 큰 어머니에게 맡겨 키우도록 했고 세자가 환궁할 때 함께 경복궁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리고 엄청난 물량의 경제적 지원과 대부인의 지위에 책봉한다. 갑자사화(1504) 이후 연산군의 폭정과 패륜은 극에 달하고 백성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을 때의 일이다. 또한 박씨 부인은 지극한 불교신자로서 남편인 월산대군의 묘 근처에 흥복사(興福寺)를 짓고 대규모 불교행사를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억불숭유’를 통치의 기본 이념으로 삼고 있던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있어 박씨 부인은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중종반정(1506)은 역사의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연산군일기에 의하면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등 반정 주동자들의 사전계획이 치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거사가 시작되자 지원자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렇더라도 전통사회에서 지존인 왕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명분이 필요하다. 박씨 부인도 그 명분을 만들어 내기 위한 희생양 중에 한 명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연산군일기의 기록도 정확한 사실이 아니라 전문(傳聞)의 형식을 띠고 있다. 

  “월산 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의 처 승평부 부인(昇平府夫人) 박씨가 죽었다. 사람들이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말했다.”(『연산군일기』12년7월20일)

  우리는 사관(史官)들의 기록을 통해서 역사를 본다. 하지만 그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정말 박씨 부인이 조카인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서 임신을 했는지, 아니면 단지 승자들의 기록일 따름인지에 대해서는 다시한번 신중히 생각해 봐야할 문제인 것이다. 
 
또 하나의 흔적, 회묘
  고양시에는 연산군과 관련한 또 하나의 중요한 유적이 있다. 바로 어머니 폐비 윤씨의 회묘(懷墓)이다. 성종의 후궁으로 입궐한 후 중전의 자리에 까지 오른 윤씨는 질투심이 많아져 후궁들을 음해하고 결국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까지 내는 사건이 발생하여 폐서인되었다가 사사된다.

  폐비 윤씨의 묘는 성종의 명에 의해 처음에는 묘비도 없이 동대문 밖에 조성되었다. 이후 7년이 지난 후 ‘윤씨지묘’라는 묘비가 세워졌다. 성종의 뒤를 이어 아들 연산군이 즉위한 이후에는 ‘제헌왕후(齊憲王后)’로 추존되고 묘호도 ‘회릉(懷陵)’으로 격상되었으나 중종반정 이후 다시 폐비로 원상복귀되고 회릉 역시 회묘로 격하되었다. 회묘는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의료원 자리에 있었으나 1969년 10월 지금의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 내 귀인․숙의(후궁) 묘역 뒤로 이장되었다. 

  서삼릉 회묘는 비공개 지역이었으나 2020년 10월부터 태실, 왕자․왕녀묘, 후궁(숙의, 빈, 귀인)묘와 함께 하루에 3회(10:00, 13:00, 15:00) 개방한다. 조선왕릉 누리집(참여마당-서삼릉 태실 관람) 사전예약을 통해서 해설사 동행 관람이 가능해 졌다. 비록 묘로 강등되었지만 연산군 시대에 조성된 왕릉 형식의 곡장, 난간석, 석물들이 남아 있어 다른 왕릉에 비해 뒤지지 않는 규모와 모습을 갖추고 있다. 봉건시대의 여성은 남편과 자식으로 인해 삶의 운명이 바뀌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폐비 윤씨는 남편 성종과 아들 연산군으로 인해 인생의 최고와 최악을 동시에 경험한 여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윤병렬 전 고양시 문화유산과장 
윤병렬 전 고양시 문화유산과장 

<참고자료>
1. 『연산군 : 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 김범 글, 글항아리, 2010년
2. 『사화와 반정의 시대』, 김범 글, 역사비평사, 2007년
3. 『고양 서삼릉의 어제와 오늘』, 김득환 글, 서삼릉태실연구소, 2021년
4.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신동준 글, 미다스북스, 2019년 
5. 「연산군대 금표설치와 경기의 농산물 유통」, 김창회 글, 『역사와 현실』,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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