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신문] 윤병열 고양시 일산동구도서관 과장의 12회에 걸친 연재 글을 고양신문에 싣습니다. 급격한 도시개발은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하지만, 그럼에도 고양에서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정체성’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달리 ‘고양성’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윤병열 과장은 32년의 공직생활을 하면서 남다르게 ‘고양성’을 고민한 공무원이었습니다. 열 개의 키워드로 열어가는 ‘고양 역사이야기’라는 연재물은 말 그대로 고양의 역사 테마별 스토리를 찾아내어 ‘고양성’을 회복하려는 마음에서 쓴 글입니다. 앞으로 매달 1회, 12회에 걸쳐 윤병열 과장의 연재글을 싣습니다. 

연재순서 

프롤로그 – 고양 역사에 얽힌 ‘스토리’, 다시 음미하다 
①고양시에 구석기 공장이 있다?
②춘향전의 원조는 고양시이다.
③“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최영장군이 한 말이 아니다
④고려 공양왕의 릉은 왜 2개인가?
⑤“고봉의 고(高)자와 덕양의 양(陽)자를 따서 ‘고양’이라 하라
⑥고양시는 임금의 사냥터였다
⑦벽제관에선 졌지만 행주산성에서 복수하다
⑧고양의 지성, 고양팔현은 어디에?
⑨남한산성은 세계문화유산, 북한산성은?
⑩마포, 뚝섬도 고양시였다
에필로그 – 110만 고양특례시의 내일과 역사 

 

열 개의 키워드로 열어가는 ‘고양 역사이야기’

세계문화유산, 국보만이 아닌
기억에 남는 역사 이야기 소개

“아빠, 도대체 역사란 무엇에 쓰는 것인지 저에게 설명 좀 해주세요.”

역사를 공부하겠다는 나에게 첫 번째로 좌절감을 안겨준 문구이다. 전두환 정권의 서슬 푸른 군부독재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80년대 초 역사학도의 부푼 꿈을 안고 대학의 문을 두드렸다. 담임교수님은 첫날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마르크 블로크의 『역사를 위한 변명』을 읽고 리포트를 제출하라고 하셨다. 대학진학을 위한 암기식 교육에 익숙해있던 내게 마르크 블로크의 역사철학은 쉬운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며칠 밤을 고민한 끝에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누더기식 베껴 쓰기로 리포트를 마감했다. 

동양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마천(司馬遷, B.C. 145~86)이 죽음보다도 더 치욕스러운 궁형(옛날 중국에서 행하던 형벌의 하나로서 죄인 스스로 자신의 생식기를 자르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사기』를 완성하고자 했던 사명은 무엇이었을까?

사마천은 바른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한무제)의 심기에 거슬렸다는 이유로 투옥되고 종국에는 반역의 모함까지 받아 사형을 선고 받는다. 하지만 그에게는 부친의 유언으로 물려받은 태사령(太史令, 중국 한나라에서 황실의 역사와 역법을 정리하던 벼슬)으로서의 임무, 즉 『사기』를 완성해야 하는 사명이 있었기에 사형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궁형을 선택하고 위태로운 목숨을 이어간다. 이때 사마천이 사대부로서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다면 아마도 중국역사 오천년의 거의 절반 정도는 소멸되어 버렸을지도 모르는 아찔한 일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의 역사관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역사를 그저 단순히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인간의 본성과 세상의 이치”를 제시하는 천명으로 인식하게 된다. 『사기』에는 당시 중국 지배집단의 규범인 육경(六經)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기(禮記)』, 『역경(易經)』, 『악기(樂記)』, 『춘추(春秋)』의 논리를 넘어서 돈을 모아 부자가 된 자, 시정잡배, 희극인 등 역사의 저변을 장식하는 서민들의 평범한 흔적도 의미 있게 다루어진다. 제왕(황제)들의 업적을 기록한 「본기(本紀)」에 여성인 여태후(呂太后)와 패장인 항우(項羽)를 포함시키고 왕이나 제후의 기록인 「세가(世家)」에 공자(孔子)를 넣음으로써 신분의 벽을 허물고 유교적 규범의 틀을 과감하게 넘어서기도 했다. 이러한 사마천의 혁신적인 가치관은 결국 동아시아 역사학의 찬란한 길을 열게 된다.

“고양시는 어디에나 내세울 만한 자랑스러운 역사(문화유산)가 있나요?” 

누군가 이런 질문을 해오면 정말 난감할 때가 많았다. 서울이나 경주, 부여, 안동과 같이 국가지정 문화재들이 즐비한 도시들이야 어디를 가도 누구나가 인정하는 볼거리와 들을거리들이 넘쳐나지만 고양시는 어디를 가야하지, 행주산성? 북한산성? 서삼릉·서오릉? 몇 군데를 나열하다 보면 더 이상 진도를 나가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90년대 이후 정부주도의 밀어붙이기 식 대규모 도시개발 사업이 휘몰아치면서 그나마 전승되고 있던 유·무형의 전통과 공동체의식 마저 거의 소멸위기에 처해 있다. 정말 고양시에는 역사적 전통을 내세울 만한 문화유산의 간판스타가 없는 것일까? 

문화유산의 간판스타란 무엇인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국보, 천연기념물. 그렇다. 경주에 가면 불국사, 석굴암, 첨성대가 있고 부여에는 정림사지 5층 석탑, 금동대향로, 낙화암이 있고 안동에는 하회마을, 도산서원, 봉정사 극락전이 있다. 

조선왕릉 40기가 200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중 고양시에는 서삼릉, 서오릉 등 8기가 소재하고 있다. 사진은 서오릉 명릉 전경. 사진제공 = 문화재청.
조선왕릉 40기가 200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중 고양시에는 서삼릉, 서오릉 등 8기가 소재하고 있다. 사진은 서오릉 명릉 전경. 사진제공 = 문화재청.
고양시와 경기도, 경기문화재단은 국가사적 북한산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사진은 북한산성 대남문 주변. 사진제공 = 문화재청.
고양시와 경기도, 경기문화재단은 국가사적 북한산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사진은 북한산성 대남문 주변. 사진제공 = 문화재청.

그렇다면 세계문화유산, 국보만이 전부일까? 이런 것들이 없는 도시는 문화유산의 간판스타를 만들어 낼 수가 없나? 오래전부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자 고민을 해왔다. 다소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지금의 시점에서 내린 진행형의 해답이 ‘스토리텔링’이다. 급격하고 무분별한 도시개발로 많은 전통과 유형의 문화유산이 파괴되었더라도 시민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무형의 자산을 이끌어내어 기록화하고 스토리텔링하는 것이다. 그것들 중에서 인간의 본성과 세상의 이치에 합당한 지역의 역사를 창조해 내는 것이다. 이러한 지역의 역사를 서술해 보고자 하는 것이 소박한 나의 꿈이다. 

‘열 개의 키워드로 열어가는 <고양 역사이야기>’는 이러한 소박한 꿈으로부터 구상을 하게 되었다. 나아가 문화 자족도시로서의 위상 마련에도 작은 힘을 보태고 싶었다. 서울의 베드타운이라는 오명을 씻고 경제적 자족도시를 추구하듯이 문화에서도 자족도시의 토대마련이 시급하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조금 걱정이 앞선다. 내가 가진 역사 일반에 대한 지식과 향토사에 대한 자료가 너무도 보잘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글쓰기 경험이 전혀 없다. 나의 글이 지면이나 온라인상에서 소개되었을 때 쏟아질 시민들의 비판이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미약하나마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고양시청에서 문화유산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는 이력으로 용기를 내고 있다. 무엇보다도 힘이 되었던 건 ‘꼭 필요한 멋진 플랜’이라고 말해준 아내의 격려다. 일단 시작해 보는 거다. 

윤병열 고양시 일산동구도서관 과장
윤병열 고양시 일산동구도서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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