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개의 키워드로 열어가는 고양 역사 이야기4

고려 공양왕 고릉 전경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제공) - 공양왕릉 뒤편으로 외손들인 고령 신씨와 연일 정씨의 묘역 보인다.
고려 공양왕 고릉 전경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제공) - 공양왕릉 뒤편으로 외손들인 고령 신씨와 연일 정씨의 묘역 보인다.

유일하게 고려와 조선의 왕릉을 함께 보유하고 있는 도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고려왕릉과 조선왕릉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는 도시는 어디일까? 고양시는 중국 교역의 통로이자 내륙수운(水運)의 동맥인 한강을 끼고 있어 삼국시대 이후 항상 역사의 핫 플레이스였다. 게다가 고려의 수도 개경, 조선의 수도 한성과는 지근(至近)거리에 있고 풍수지리상으로도  명당의 기운을 지니고 있어 왕릉과 사대부들의 묘가 많이 몰려 있다. 비운의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릉이 덕양구 원당동에 자리 잡고 있으며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 40기 중 서삼릉과 서오릉(8기)이 덕양구 원당동, 용두동에 위치해 있다. 

  이중에서 오늘은 슬픈 전설을 남기고 고양시에 잠들어 있는 공양왕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공양왕을 얘기할 때 흔히들 “등 떠밀려 왕이 된”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高麗史』의 기록에 의하면 “몇 번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추대되자 두려워 잠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즉위를 고하는 예식을 마치고나서도 신하들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위화도 회군 후 최영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이 공양왕을 추대한 것은 “나약한 성격의 소유자로 이성계의 집권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공양왕이 꼭두각시로서 왕조교체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가 꺼져가는 고려왕조의 불씨를 무력하게 쳐다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즉위 후 장단(長湍)에 은거하고 있던 이색(李穡, 1328~1396)을 찾아가 “도와달라”고 부탁하면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기용하였다. 원로 무장인 변안열과 왕안덕을 재등용하였던 것도 같은 의도에서였다. 대간(臺諫)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군사시설을 순시하기도 하였으며 개혁파 신진사대부들을 멀리하고 한양천도 계획도 실행한다. 하지만 이미 고려왕조를 다시 부활시키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신진사대부들은 이성계를 명나라에 무고(誣告)한 윤이․이초(尹彛․李初) 사건(1390)을 계기로 체제유지파의 핵심인물들을 몰아내고 이어 마지막 걸림돌이었던 정몽주(鄭夢周)마저 선죽교에서 제거한다. 다음 차례는 공양왕이었다. 우시중 배극렴(裵克廉)은 “왕이 군도(君道)를 잃고 인심이 떠나 사직과 생령(生靈)을 맡길 수 없다”고 폐위상소를 올렸고 결국 왕대비의 명으로 공양왕은 폐위되어 원주로 추방된다.

고려 공양왕 고릉 앞 석조물인 호랑이상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제공) - 설화에 등장하는 삽살개라는 주장도 있으나 왕릉을 보호, 장식하는 호랑이 상이다.
고려 공양왕 고릉 앞 석조물인 호랑이상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제공) - 설화에 등장하는 삽살개라는 주장도 있으나 왕릉을 보호, 장식하는 호랑이 상이다.


식사동의 유래와 슬픈 설화 
  정사(正史)의 기록과는 별도로 고양시에는 공양왕과 관련된 설화와 지명이 다수 전해진다. 어침사(지), 왕릉골, 식사동, 대궐고개 등이 그것이다. 

  “폐위된 공양왕 부부는 이성계 일파를 피해 도망치다가 고양 땅에 이르러 날이 어두워지자 하루 밤 묶을 곳을 찾는다. 건너편 골짜기에 희미한 불빛이 보여 알아보니 허름한 절이었다. 왕과 왕비는 그곳 스님의 배려로 견달산 아래 작은 절에서 며칠 묶게 된다.(御寢寺 또는 魚沈寺) 절에서 며칠 묶으며 휴식을 취한 공양왕 부부는 자객의 위협을 피해 다시 대궐고개를 넘어 다락골의 작은 동굴로 피신한다. 이곳에 피신해 있을 때 절에서 밥을 지어 날랐다하여 절이 있는 동네의 이름이 식사리(食事里)로 바뀌게 된다. 다락골에 숨어있던 공양왕 부부는 계속되는 추격을 피해 다시 지금의 왕릉골로 피신했지만 결국 그곳에서 반나절도 못 버티고 연못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이에 이성계는 장례를 치르고 왕릉을 세우니 왕릉골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사실 『고려사』등 정사의 기록과 고양시에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의 내용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정사에는 폐위된 공양왕이 “군(君)”으로 강등되어 원주로 추방되었다가 다시 강원도 간성(지근의 고성)으로 옮겨 2년여를 지내게 된다. 이 기간 중에 발생한 구체제 복원 세력들의 반란모의는 결국 조선을 건국한 사대부들의 위기의식과 경계심을 촉발하여 1394년 공양왕 부부와 두 아들을 삼척으로 재 유배시킨 뒤 교살한다. 

  몰락한 비운의 왕은 이렇게 오십의 고단한 생을 마감하고 아들들과 함께 삼척에 묻힌다. 죽은 뒤에도 숨을 죽여야 했던 그는 역설적이게도 고려왕조 침몰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조선 태종(이방원)에 의해 다시 공양왕으로 추봉(追封)되고 개경과 가까운 고양 땅으로 이장되어 고릉(高陵)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척 공양왕릉 전경 (삼척시 문화홍보실 제공) -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에 조성되어 있는 공양왕릉. 삼척시도 지방의 기록을 근거로 진짜 공양왕릉임을 주장하고 있다.
삼척 공양왕릉 전경 (삼척시 문화홍보실 제공) -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에 조성되어 있는 공양왕릉. 삼척시도 지방의 기록을 근거로 진짜 공양왕릉임을 주장하고 있다.


 공양왕 고릉 가는 길
  공양왕릉으로 가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고양시청에서 원당로를 따라 벽제교 방면으로 가다가 원당 삼거리 직전에 일산교자(구 일산칼국수)를 끼고 좌회전하면 된다. 차를 이용할 경우 10분이면 충분하고 버스를 이용할 경우에도 왕릉골 정류장에서 내려 맞은편 아스팔트로 잘 포장된 공양왕길을 따라 걸으면 이내 도착한다. 우측으로는 민가가 있고 좌측으로는 논밭이 펼쳐진 한적한 시골길이다. 좀더 걷기를 원할 경우 “배다리 누리길”을 이용하면 된다. 고양시청 후문으로 나와 마상공원을 지나면 배다리누리길이 나오는데 한 40분 쯤 걸으면 공양왕릉이 있는 왕릉골에 도착한다. 

  공양왕릉에 도착해 보면 다소 초라하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조선왕릉의 웅장하고 수려한 자태에 익숙해 있는 시선이라면 “이게 왕릉이야?”라는 실망감이 들 수도 있다. 능역 자체는 그다지 좁은 편은 아니지만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丁字閣)도 없고 석물들도 비교적 왜소하다. 더군다나 뒤편으로는 사대부 묘 6기가 조성되어 있어 왕릉으로서의 근엄함이 위축되어 보이기도 한다. 사대부 묘에 대해서는 패망한 왕조에 대한 무례함으로 오해할 수도 있으나 사실은 공양왕의 외손들인 고령 신씨와 연일 정씨의 묘소이다. 일종의 묘지기로서 공양왕릉을 보호하기 위함으로 알려져 있다. 

  고단했던 영혼, 이제는 편히 쉬어야
  『태종실록』과 『세종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1416년(태종 16) ‘공양군(恭讓君)’에서 ‘공양왕’으로 추봉(追封)되었고, 1437년(세종 19) 안성군 청룡사의 공양왕 어진을 고양현의 암자로 이안”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참고로 하면 고양시의 공양왕릉이 국가에서 인정한 공식 왕릉임이 분명하며  1970년 2월 국가 사적 제191호로 지정되었다. 반면에 삼척시도 1995년 9월 『척주지(陟州誌)』, 『관동읍지』 등 지역의 기록에 근거하여 강원도 기념물 제71호로 지정하며 진위논쟁에 불을 지폈다. 여기에 공양왕을 끝까지 모셨던 예부상서 출신의 함부열이 삼척에서 시신을 수습하여 고성에 릉을 조성하고 대대로 제를 모시고 있다는 주장도 있어 공양왕릉은 사실상 세 곳이나 존재한다. 패망한 왕조의 마지막 군주가 생사를 뛰어 넘어 겪어야 했던 비극을 보는 듯해 못내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진위논쟁은 의미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세 곳 모두 공양왕과 인연이 깊은 곳으로 나름의 흔적과 근거를 가지고 있다. 이제는 모두 공양왕릉으로서 인정을 하고 그의 영혼이라도 편히 쉴 수 있도록 기원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가져야할 자세가 아닌가 한다. 

윤병열 일산동구도서관
윤병열 고양시 일산동구도서관 과장  

 


<참고자료>
1. 『사적 제191호 고양 공양왕릉 종합정비계획 보고서』, 고양시, 2021년
2. 『공양왕의 마지막 동무들』, 김경옥 글, 최정인 그림, 청어람주니어, 2019년
3. 「高麗末 恭讓王代 新興儒臣의 對立과 政治運營論」, 홍영의, 『사학연구』 제76호, 2004년 
4. 『길, 고양 문화유산 이야기』, 정동일;김수현;오보하, 고양시, 20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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