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개의 키워드로 열어가는 고양 역사 이야기3
최영장군의 신통력, 산불도 피해가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인 2015년 3월 하순의 일이다. 산불이 그다지 많지 않은 고양시에서 산림 12㏊를 태우는 큰 산불이 덕양구 대자동 일원에서 발생했다. 그 지역에는 경기도 지정문화재인 고양향교, 최영장군묘를 비롯하여 중남미문화원, 성녕대군묘 등 문화시설이 많은 곳이다. 시와 소방, 경찰 당국에서 신속하게 대응한 덕분에 다행히 주불은 세 시간만에 진화됐고 밤 11시경에는 잔불정리까지 마쳤다.
이날 산불진화 과정에서는 하나의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었다. 최영장군의 신통력이 그것이다. 현장에서 산불진화 작업에 나선 직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최영장군 묘역 쪽으로 향하던 불길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일대가 다 심각한 피해를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장군의 묘역만큼은 전혀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최영장군의 신통력, 영력(靈力)에 대한 일화는 이외에도 많다. 어떤 시민은 최영장군의 넋을 기리는 위령굿을 참관하다가 굿을 주재한 만신(萬神)을 통해 장군의 신기(神氣)를 받고 회사에서 승승장구하여 그 만신을 거의 신적인 존재로 모셨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선친에게 받은 유훈 “황금 보기를…”
고양시를 상징하는 역사적 인물하면 고려 말의 충신 최영(崔瑩, 1316~1388)과 임진왜란 3대첩의 영웅 권율(權慄, 1537~1599)을 우선적으로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두 사람 모두 고양시 출신은 아니다. 최영은 지금의 철원 혹은 홍성 출신이라는 두 가지의 설이 있고, 권율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려 말 충정과 청렴의 상징인 최영은 충숙왕 3년(1316년) 아버지 최원직과 어머니 봉산 지씨 사이에서 1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계를 보면 대대로 문관을 지낸 명문가이며 아버지 최원직은 사헌부 간관을 지낸 올곧은 인품의 소유자였다. 조선전기 성현(成俔, 1439~1504)의 수필집인 『용재총화』에 의하면 그는 최영에게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見金如石)”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최영은 평생 아버지의 유훈을 가슴속에 새기며 무인으로서는 무서우리만큼 엄격했지만 일상생활과 정치활동에서는 부정부패가 만연하던 고려 말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서도 청빈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럼 고양시 출신도 아닌 최영이 어떻게 고양시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나? 『고려사』 등의 기록에 따르면 최영과 고양시와의 인연은 몇 차례가 있었는데 1365년 여가를 내어 고양 땅(당시의 고봉현)에서 사냥을 했다는 내용이 그 첫 번째이다. 이때 실권자인 신돈(辛旽, ?~1371)은 국가가 어려울 때 한가롭게 사냥이나 즐긴다는 꼬투리를 잡아 대립각을 세우던 최영을 지방으로 좌천시킨다. 신돈의 실각 후 복직한 이후에는 1382년 왜적을 격퇴한 공으로 우왕으로부터 부친의 묘소가 있는 고양의 땅 300여 결을 하사받지만 백성들의 어려움을 고려하여 세(稅)를 거두지는 않았다. 말년인 1388년에는 이성계가 주도한 위화도 회군 후 주력군에게 패한 뒤 체포되어 고양으로 유배를 온다. 이후 개경으로 압송되어 참수를 당하고 부친의 묘소가 있는 현재의 장소(고양시 대자동)에 묻히게 된다. 최영은 이렇게 하여 비로소 고양의 상징적인 인물로 자리를 잡는다. 부친의 묘소가 고양시에 자리잡게 된 인연에 대해서는 『고양시사』제2권에서 출신지를 고봉현(고양시)으로 적고 있지만 이에 대한 정확한 근거는 찾을 수가 없다.
구국일념으로 고려와 함께해
최영이 역사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공민왕 1년(1352년) 그의 나이 37세 때 조일신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정9품에서 정4품으로 특진한 때부터다. 공민왕 3년(1354년)에는 중국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의 하나인 장사성의 난을 평정하는데 동원되어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인다. 이때 최영은 기울어가는 원나라의 실상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돌아와 자세히 보고함으로써 공민왕의 반원개혁에 자신감을 더해준다. 이후 여진족, 왜구, 홍건적 등의 수많은 외침과 공민왕을 노린 흥왕사 김용의 난, 기황후가 공민왕을 제거하려고 조장한 덕흥군 사건 등 내부의 반란을 평정하면서 고려를 위기에서 구한다. 이색(李穡, 1328~1396)의 표현대로 잠시의 쉴 틈도 없이 전국을 누비며 ‘87전 87승’의 위대한 성과를 올린 충신이라고 할 수 있다. 최영은 이처럼 나라를 위해 평생 목숨을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왕조교체기라는 역사적 운명의 바람 속에서 시대를 거역한 역적으로 몰려 억울한 죽음을 맞는다.
억울한 죽음과 장군신으로 추앙
조선을 건국한 세력 측에서 보자면 최영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대국인 명나라에 대항한, 그래서 자칫 고려의 백성을 전쟁의 도탄에 빠지게 할 수도 있었던 대역 죄인이었다. 그럼 백성들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조선 세종 때 편찬된 『고려사』권113 「최영 열전」에 당시 백성들의 태도가 나와 있다.
“최영이 죽은 날 개경 사람들은 장사를 쉬었다. … <중략> … 아이들과 부녀들까지 모두 눈물을 흘렸다. 시신이 길에 버려지자 행인들은 말에서 내려 조의를 표했다.”
백성들의 시각에서 보면 억울한 죽음임에 틀림없다. 최영은 죽어서도 백성들의 가슴에 ‘장군신’으로 남아 민간신앙과 무속신앙에서 최고의 신으로 받들어진다. 장군이 활약했던 전국 곳곳에는 사당이나 기념물이 세워지고 무속인들을 매개로 백성들은 그의 영력(靈力)에 의지하고 추앙한다.
고양시에는 ‘최영장군 위령굿보존회’가 구성되어 있다. 매년 가을 통일로에서 최영장군 묘로 들어가는 입구인 필리핀군참전비 앞 광장에서 지정자 만신이 주관하는 위령굿이 펼쳐진다. 이 위령굿은 고양시향토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탄생 700주년이었던 2016년에는 묘역 아래 주차장에 그의 충절과 청렴정신을 기리는 기념비(2017년에 건립)를 세우고 시민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비의 전면에는 부친의 유훈인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장군의 업적이 연대별로 기록되어 있다.
주차장에서 숲속 오솔길을 따라 10분 정도 오르면 최영장군 묘역에 이른다. 이 길은 고양동누리길(필리핀군참전비~성녕대군사당~최영장군묘~고양향교, 중남미문화원~안장고개, 6.9㎞)의 한 부분으로 사시사철 자연이 주는 고즈넉함을 느낄 수 있는 걷기 편한 힐링 구간이다. 오솔길을 지나 안내판이 있는 곳에서 돌계단을 올라가 묘역에 이르면 먼저 좌측으로 돌무더기가 눈에 띈다. 처음엔 최영장군을 모시는 무속인들이 신앙의 표시로 하나 둘씩 쌓았던 것인데 이제는 일반 참배객들도 소망 쌓기에 동참하고 있다.
묘역은 2개의 봉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위쪽이 부친인 최원직의 묘이고 아래 쪽이 장군과 부인 문화유씨의 합장묘이다. 묘지 앞쪽에는 묘비와 충혼비, 상석, 혼유석 등이 있고 망주석과 문인석 각 한 쌍이 좌우로 배열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좌측 문인석의 코 부분이 항상 닳아져 있는 것이다. 코를 조금씩 갈아서 미역국에 넣어 먹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확인되지 않은 미신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요즘도 장군의 묘역에는 신기를 보충 받으려는 무속인들이 방문하고 있으며 군인, 도보 여행가들도 자주 찾아와 장군의 충절과 청렴정신을 기리고 있다.
<참고자료>
1. 『고양의 최영 장군 이야기』, 고양문화원
2. 『역사저널, 그날 : 고려편. 4, 충열왕에서 최영까지』, 민음사
3. 『길, 고양 문화유산 이야기』, 정동일;김수현;오보하, 고양시
4. 『열정과 지존의 오백년, 고려사』, 이상각, 들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