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다큐 <승리한 패배자들>
& 김민기 노래 ‘봉우리’
[고양신문] 파리올림픽이 끝났다. 자본과 국가 권력의 커넥션으로 지탱되는 올림픽 매커니즘을 떠올리며 짐짓 무관심을 가장해 보지만, 막상 경기가 시작되면 선수들 한명 한명이 쏟아내는 생동감 넘치는 드라마에 번번이 열광하곤 한다.
이번 올림픽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는 남자역도 73kg급에 도전해 7위를 기록한 박주효 선수였다. 심각한 부상을 불굴의 의지로 극복해낸 선수답게 표정과 눈빛에 남다른 간절함이 배어있었고, 무엇보다도 마지막 3차 시기에서 바벨을 등 뒤로 떨어뜨린 후 허공을 향해 두 팔을 휘저으며 온몸으로 절규했던 장면은 모두에게 강렬한 인상을 안겨줬다.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박 선수는 “솔직히 메달 따지 않으면 금방 잊혀진다. 그래서 지금 많이 서럽다”고 말하며 연신 눈가를 훔쳤다. 물론 박 선수가 고양시청 역도부 소속이라 그의 몸짓 하나하나에 좀 더 몰입했던 것도 사실이다.
올림픽뿐만이 아니다. 주말에 K리그 축구중계를 보다가도 요즘엔 종료 휘슬과 동시에 그라운드에 쓰러져버리는, 패배한 팀 선수들의 탈진한 모습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승리를 손에 넣지 못한 이들에게 몰입감, 또는 동질감을 느낀다는 건 그다지 좋은 징조는 아닌 것 같아 걱정도 된다.
필자와 비슷한 증상을 겪는 이들에게 추천하고픈 넷플릭스 작품이 있다. 2019년에 제작된 스포츠 다큐멘터리 시리즈 <승리한 패배자들>이다. 아버지의 등쌀에 밀려 억지로 글러브를 낀 복싱선수, 만년 꼴찌지만 여전히 동네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축구팀, 사막 마라톤에 도전했다가 목숨을 잃을 뻔한 마라토너, 사적인 문제로 코트에서 꽃피우지 못한 재능을 서커스단에서 펼치고 있는 전직 농구선수 등 회차마다 다른 주인공, 다른 스토리가 펼쳐진다.
하나같이 정상에 우뚝 서서 받아드는 영광의 트로피와는 인연이 없는 이들이지만, 스포츠를 통해 그들은 저마다 다른 모양, 다른 색깔의 ‘승리’를 선물 받는다. 회차당 시간도 30분 내외로 짧고, 보고 싶은 회차만 골라봐도 상관 없다.
결이 조금 다르지만, 패배자를 위로하는 노래도 한 곡 떠오른다. 얼마 전 작고한 김민기의 ‘봉우리’다. 93년 겨울 무렵이었을까, 술자리에서 선배 A가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주절댔다.
“니들 얼마 전 나온 김민기의 ‘봉우리’라는 노래 들어봤니? 처음 듣는 순간 눈물이 쏟아지더라구. 사회변혁의 꿈을 잃고 방황하는 후배들을 위해 김민기 선생님께서 위로의 노래를 만드셨다, 이 말이야.”
그랬더니 한쪽에서 조용히 잔을 기울이던 또 다른 선배 B가 같잖다는 듯 말을 잘랐다.
“놀구 있네. 얌마, 봉우리는 김민기가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일찍 탈락한 선수들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노래라구.”
정말? B선배의 해석에 마음이 끌렸다. 하지만 B선배도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김민기가 영감을 얻은 스포츠대회에 대해 한 신문기사는 88올림픽이라고 적었고, 어떤 평론가는 86아시안게임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중에 알아보니 ‘봉우리’는 이미 1985년 양희은이 다른 제목으로 발표했던 노래였다. 그러니 정답은 84년 LA올림픽이었던 것. 뭐 LA면 어떻고, 서울이면 어떻고, 바르셀로나나 파리면 무슨 상관인가. 각자 ‘내 마음 속 올림픽’의 기억에 이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깔면 될 일이다.
도전에 실패해 고개를 떨구고, 눈가를 훔치는 선수들의 모습이 왠지 남의 일 같지 않게 여겨진다면, 김민기가 특유의 저음으로 속삭여주는 ‘봉우리’의 몇몇 대목들을 천천히 중얼거려보자.
“이봐, 고갯마루에 오르더라도 뒤돌아서서 고함치거나 손을 흔들어댈 필요는 없어... 또 그렇다고 괜히 허전해하면서 주저앉아 땀이나 닦고 그러지 마. 땀이야 지나가는 바람이 식혀주겠지 뭐. 혹시라도 가끔 어쩌다가 아픔 같은 것이 저며올 땐, 그럴 땐 바다를 생각해, 바다… 봉우리란 그저 넘어가는 고갯마루일 뿐이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