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터널 애니멀스> (2017, 톰 포드)
[고양신문] 미술관 아트디렉터 수잔(에이미 아담스)은 외형적으로 화려하고 성공적인 삶을 사는 듯 보이지만, 내면은 불안정하고 피폐하다. 미술관에서 기획하는 ‘개념미술’ 전시의 공허함에 스스로 신물이 났고, 재력과 남성미를 겸비한 남편은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바람을 피우는 눈치다. 불면의 나날을 보내는 수잔에게 어느 날 두툼하게 가제본한 <녹터널 애니멀스>(야행성 동물)라는 제목의 소설뭉치가 배달된다. 20여 년 전 헤어진, 소설가 지망생이었던 전 남편 에드워드(제이크 질렌할)가 보내온 것이다.
소설 첫 장을 넘기면서부터 수잔은 이야기에 빠져든다. 인적 없는 도로를 달리던 소설 속 주인공 토니(제이크 질렌할)의 가족 앞에 폭력적인 사내들이 나타나 아내와 딸을 납치해간다. 동네 보안관과 함께 범죄자들의 뒤를 쫓는 토니의 내면은 사랑하는 이들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 납득되지 않는 불행에 대한 분노가 뒤엉켜 점점 끔찍한 악몽으로 치닫는다.
소설 속 이야기가 전개되며 또 하나의 이야기가 베일을 벗는다. 만나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갈등하다가 결국은 헤어지게 된, 젊은 시절 수잔과 에드워드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영화는 지금 세 개의 세계를 관객들에게 펼쳐놓고 있는 셈이다. 하나는 부유층의 허망한 가식에서 허우적대는 수잔의 현재, 두 번째는 에드워드가 창작한 소설 속 복수 이야기, 마지막으로 수잔과 에드워드의 과거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세 개의 세계는 형식적으로는 모두 수잔의 시선에서 재구성된 것이다. 하지만 차이도 분명하다. 첫 번째 세계는 온전히 수잔의 것이지만, 두 번째 세계는 에드워드에 의해 던져진 이야기를 수잔이 이미지로 상상한 화면이고, 세 번째는 수잔과 에드워드가 함께 겪은 시간들에 대한 수잔의 기억이다. 마치 이야기의 층위와 주체, 작가와 독자, 문자텍스트와 영상이미지에 대한 흥미로운 실험 속으로 감독이 관객을 초청하는 듯하다.
영화로 다시 돌아가면, 수잔은 소설 속 주인공이 겪는 악몽에서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버림받은 에드워드의 비명소리를 듣는다. 자신을 둘러싼 부유층의 속물성을 거부하며 섬세하고 순수한 내면을 가진 에드워드를 사랑했지만, 결국 초라한 현실과 불투명한 미래를 견디지 못하고 부유하고 능력 있는 현재의 남편을 선택했던 것.
헤어질 무렵 수잔은 독자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엔 관심 없고, 오로지 자신의 이야기에만 천착하는 에드워드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모든 소설가는 다 자기 얘기를 쓰는 것 아냐?”라고 반문한다. 수잔이 소설 속 토니의 얼굴을 에드워드의 얼굴로 자연스레 상상하는 이유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을 무렵, 에드워드는 메시지를 통해 수잔과 재회의 약속을 잡는다. 약속장소인 고급 레스토랑에서 에드워드를 기다리는 수잔의 얼굴에는 미안함과 설렘이 묘하게 뒤엉켜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설렘은 초조함으로, 또다시 절망감으로 바뀐다. 에드워드가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그러고보니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궁금함’이 끌고 가는 이야기였다. 수잔은 뒷이야기가 궁금해 소설로 빠져들고, 소설 속 주인공 토니는 아내와 딸의 마지막 말이 뭐였는지가 궁금해 범좌자를 쫓고, 에드워드는 수잔이 자신을 버린 이유가 궁금해 소설을 창작하고, 이제 수잔은 에드워드가 왜 안 나타났는지를 궁금해하며 살아가게 생겼다. 관객들에게 에드워드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너도 한번 궁금해서 미쳐보라구. 내가 너랑 헤어진 이후 쭉 그랬던 것처럼.” 이쯤 되면 뒤끝과 찌질함의 대마왕이라 할 만하다.
사실 진짜로 찌질한 건 남녀 관계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려는 감독의 편항적 시선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이야기 구조, 감각적인 스타일(감독 톰 포드는 구찌와 입생로랑의 총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출신이다), 배우들의 기막힌 연기(남녀 주인공은 물론, 소설 속 보안관 역을 맡은 마이클 새넌의 연기도 압권이다) 등 건질 게 많은 영화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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