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들> (2023. 정지영)
[고양신문] 정지영 감독의 2023년 작품 <소년들>을 넷플릭스를 통해 봤다. 감독 얘기를 먼저 해 보자. 1946년생인 정지영 감독은 현역 최고령 감독으로 불린다. 90세를 넘기고도 가뿐히 메가폰을 잡는 헐리우드 노익장들도 있긴 하지만, 나이 든 감독에게 좀처럼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한국영화계의 환경을 고려하면, 78세에도 여전히 머리를 짜내며 차기작을 궁리하는 정 감독의 존재가 소중할 수밖에 없다.
정지영 감독과는 인연이 깊다. 물론 정 감독님이 필자를 안다는 건 아니고, 청소년기부터 한국영화 팬이었던 내가 정 감독과의 인연을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우선 그의 데뷔작인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1983)를 중딩 때 동네 재개봉관에서 엄청 재미나게 관람했다. 제목에서 짐작되듯 미성년자 관람불가였지만, 홍콩 쿵푸영화와 동시상영을 걸었던 연신내 양지극장의 허술한 입장 관리 시스템 덕을 봤다.
감독의 세 번째 작품인, 한수산 원작을 영화로 만든 <거리의 악사>(1987)는 고3 때 종로 단성사 극장에서 개봉 첫날 관람했다. 극장 앞마당에서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는 정지영 감독의 바바리코트가 멋져 보였다.
그의 전성기는 <남부군>, <하얀전쟁>,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연이어 발표하며 한창 주가를 올렸던 90년대 초였다. 앞서 헐리우드 자본의 한국영화시장 진출을 막아내기 위한 UIP 직배 반대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던 정 감독은 작품성과 사회성 양 측면에서 한국영화를 이끌 리더로 주목받았다.
이후 연이은 흥행 실패로 2000년대를 통째로 놀면서 보내며(물론 진짜 놀지는 않으셨겠지만) 잊혀진 이름이 되어가던 정 감독은 2011년 <부러진 화살>의 성공에 힘입어 기적적으로 재기에 성공한다. 이후 <남영동 1985>, <블랙머니>를 내놓지만, 아쉽게도 <부러진 화살>의 성취를 아직 재현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천안함 프로젝트>, <국정교과서 516일> 등 사회적 메시지가 강한 다큐 제작에 힘을 쏟기도 했다. 그 무렵 지역신문 기자가 된 필자는 오랫동안 멀리서 응원을 보내던 정지영 감독을 직접 인터뷰하는 기회를 얻으며 소소한 성덕을 이뤘다.
영화 얘기를 해 보자. <소년들>은 1999년 전북 완주에서 발생한 ‘삼례 슈퍼 3인조 강도살인사건’의 주범으로 찍혀 형을 살고 나온 세 친구가 재심을 통해 범죄자의 누명을 벗는 과정을 다뤘다. 연상되는 영화가 있다. 2017년 제작된, 강하늘과 정우가 출연한 영화 <재심>(감독 김태윤)이다.
두 영화는 비슷할 수밖에 없다. 애초 정 감독도 <재심>의 소재인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을 영화로 만들려고 각색작업을 시도했었기 때문이다. <재심>이 먼저 만들어지자 정 감독은 이야기의 줄거리를 ‘삼례 사건’으로 변경했지만, 주인공 캐릭터는 ‘익산 사건’의 실제 형사반장을 모델로 삼았다. <재심>이 변호사의 활약에 초점을 맞춘 덕분에 정 감독이 훨씬 인상 깊게 봐 두었던 형사반장 캐릭터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두 영화의 차이점은 또 있다. <재심>이 누적관객 230만명을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한 반면 <소년들>은 손익분기점에 한참 못미치는 흥행성적을 기록하며 박스오피스에서 조용히 내려왔다. 사회성 있는 소재로 화제를 집중시킨 <재심>의 성공을 보며 <소년들>의 제작진도 기대를 걸었겠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작용한 듯하다. 코로나 시기를 겪으며 극장으로 향하는 마음의 문턱이 더 높아진 관객들로서는 굳이 비슷한 소재의 영화에 관심을 돌릴 이유가 없었던 것 같다.
<소년들>의 흥행 실패를 바라보는 마음은 씁쓸하다. 영화 자체가 별로라면 몰라도, 나름 장점이 많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우선 주인공 형사반장의 캐릭터가 매력적이다. <공공의 적> 시절부터 형사 캐릭터와 찰떡궁합임을 증명한 설경구의 연기도 오래간만에 훌륭하다. 억울하게 누명을 쓴 이가 한 명이 아니라 세 명이라는 점은 <재심>에 비해 더 넓은 이야기의 공간을 깔아준다. 전체적으로 연기자들과 이야기의 밸런스를 조율하는 지점에서 노장의 연출력이 빛난다.
조직의 악행과 제대로 맞짱뜨기 위해 형사배지를 집어던진 주인공은 영화 말미에 ‘무죄’로 번복된 재심 결과를 안고 기뻐하는 30대 중반 세 친구들의 모습에서 십대 소년들의 표정을 읽어낸다. 저 해맑은 ‘소년들’의 웃음을 누가 빼앗아갔느냐고 묻는 것이다. 그것은 노장 감독의 깊은 시선이기도 하다.
단점도 분명하다. 조직의 이름으로 악을 행하는 캐릭터들이 너무 전형적으로 그려졌고, 막판에는 한국영화의 고질병인 가족 신파로 빠져버려 어렵게 쌓아 온 영화적 긴장감이 맥없이 느슨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왠지 고맙다. 영화의 장면마다 사회적 정의에 여전히 예민한 '청년 감독 정지영'의 열정이 여전히 어른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감독의 다음 영화를 꼭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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