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벨만스> (2022. 스티븐 스필버그)
[고양신문] 20세기를 대표하는 영화감독 한 명을 꼽으라면, 많은 이들이 주저 없이 “스티븐 스필버그!”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개인적 선호에 따라 ‘내 맘속 넘버 원 감독’은 저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영화팬 모두의 이름으로 추앙할 만한 최고 감독은 누가 뭐래도 스필버그다. 70~80년대에 아동·청소년기를 보낸 필자 역시 스필버그가 그려낸 세계를 동경하며 자랐다. 당시 물 위에 뭔가가 떠 있는 모습을 본 아이들은 하나같이 “죠스다!”를 외쳤었고, 외계에서 날아온 생명체는 당연히 식빵머리에 큰 눈망울, 긴 손가락을 가진 모습이어야 했다.
공포는 얄밉게 감춰두고, 판타지는 경이롭게 열어젖히는 초기 대표작들의 상반된 스타일이 말해주듯, 스필버그의 가장 큰 매력은 한마디로 ‘다양성’이다. 흥미진진한 모험(인디아나 존스, 쥬라기공원), 가슴 울리는 드라마(컬러퍼플, 쉰들러 리스트), 몰입감 생생한 전쟁터(라이언일병 구하기), 미래 배경의 존재론적 질문(마이너리티 리포트, A·I) 등등…. 어떻게 한 감독의 손에서 이토록 다양한 장르의 걸작들이 줄줄이 쏟아져나올 수 있을까. 혹시라도 어느날 외계인이 찾아와 “영화라는 게 뭔가요?”라고 묻는다면, 고민할 것 없이 “스필버그가 만든 것들을 보셔”라고 대답해주면 될 것 같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에는 화제의 중심에서 좀 밀려나 있었다. 영화산업 환경도, 관객들의 취향도 빠른 속도로 달라졌으니까. 그랬던 스필버그의 이름을 또다시 팬들과 평론가들 입에 오르내리도록 만든 영화 한 편이 재작년에 발표됐다. 바로 <파벨만스>다. 언젠가는 꼭 봐야지, 숙제처럼 기억해두었는데 최근 넷플릭스에 올라와 너무나 반가웠다.
영화는 스필버그 자신의 성장기를 그려낸 영상 자서전이다. 영화 속 주인공 소년 새미 파벨만과 스필버그를 분리해서 봐도 너무너무 재밌는 영화지만, 스필버그의 기나긴 필모그래피를 마음속 모니터창에 띄워두고 감상하면 또 다른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영화에 묘사된 성장기의 다양한 사건들이 스필버그의 영화세계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상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인상적으로 본 몇 장면만 언급해보자.
새미의 부모는 성향이 너무도 다른 인간들이다. 공학적 천재성을 지닌 아빠는 타인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반면, 예술적 감성이 가득한 엄마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다. 스필버그는 부모의 서로 다른 장점을 골고루 물려받은 것 같다. 그의 영화에 늘 정교한 설계와 뜨거운 감성, 관객을 향한 배려와 감독의 고집이 동시에 녹아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새미는 가족의 일상을 찍은 8mm 필름을 세심히 들여다보다가, 엄마가 감추고 있는 충격적인 비밀을 발견한다. 말이나 글이 아닌 영상이, 어떻게 삶의 예리한 진실을 포착해낼 수 있는지를 일찌감치 스스로 깨우친 것이다.
영화는 어린 시절 스필버그가 매료됐던 스토리들이 나중에 어떤 영화로 발전했는지에 대한 힌트도 담겼다. 친구들을 동원해 찍은 아수라장 전투씬은 훗날 <라이언일병 구하기>의 명장면들이 됐고,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폭력에 내몰리는 대목에서는 <쉰들러리스트>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앞서 말했듯 영화는 진실을 포착할 수 있지만, 반대로 감독의 시선과 편집을 통해 진실을 조작하는 매체이기도 하다. 주인공 새미는 학교축제를 찍은 필름을 통해 자신에게 폭력을 가한 두 명의 동급생을 하나는 너무도 멋진 영웅으로, 다른 하나는 형편없는 찌질이로 만들어버린다. 몇 권의 책에 담겨야 할 연출·편집이론을 스필버그는 영화 속의 한 에피소드를 통해 명쾌히 설명해버린다.
독학으로 영화를 가지고 놀며 성장한 새미는 본격적으로 스튜디오 입사에 도전하는데, 한 프로듀서의 소개로 당대 최고의 웨스턴무비 감독인 존 포드와 5분 미팅 기회를 얻는다. 자신의 영웅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새미에게 존 포드는 벽에 걸린 스틸사진 두 장을 가리키며 알 듯 모를듯한 얘기를 지껄인다.
“지평선이 아래에 깔린 화면은 흥미로워. 지평선이 위에 걸쳐진 화면도 흥미로워. 지평선이 중간에 있는 화면은? 졸라 재미없어!”
쫓겨나듯 존 포드의 방을 나왔지만, 새미의 얼굴에는 깨달음이라도 얻었다는 듯 환희의 표정이 차오른다. 스필버그는 관객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때 존 포드가 던져 준 한 줄 화두를 때로는 이렇게, 때로는 저렇게 풀어낸 것들이 내 영화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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