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고양 1989~1990⑧ 한강제방 붕괴

1990년 9월 12일 새벽, 순식간에 닥쳐온 악몽
한강변 따라 이어진 가옥과 농경지 대부분 침수 
이재민 구하고, 강둑 연결하고… 힘 모아 ‘사투’

[고양신문] 모두가 알다시피 고양시는 1990년대 초 1기 신도시 일산을 비롯해 중산, 탄현, 화정, 성사, 행신 등 택지개발지구가 동시다발로 들어서며 인구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도시다. 이 시기에 맞춰 시 승격이 이뤄진 게 1992년이고, 당시 인구는 27만여 명이니 오늘날 108만 인구와 비교하면 정확히 4분의 1이다. 물론 그 27만 명 중 오늘날까지 고양시민으로 살고 있는 이들의 숫자는 훨씬 적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34년 전인 1990년 9월 12일 새벽, 행주대교 아래쪽 1.5km 지점의 한강둑이 붕괴되며 고양군 일대가 물바다가 됐다. 헬기에서 찍은 위 사진을 보면 사산마을과 삼성당언덕 등 지대가 높은 곳을 빼고 능곡벌판과 신평리, 백석리 일대가 모두 물속에 잠겨버렸다. 
지금으로부터 34년 전인 1990년 9월 12일 새벽, 행주대교 아래쪽 1.5km 지점의 한강둑이 붕괴되며 고양군 일대가 물바다가 됐다. 헬기에서 찍은 위 사진을 보면 사산마을과 삼성당언덕 등 지대가 높은 곳을 빼고 능곡벌판과 신평리, 백석리 일대가 모두 물속에 잠겨버렸다. 

고양군 시절을 살았던 토박이와 고양시 시절에 이주해온 이들을 구분하는 선명한 기억의 바로미터가 있다. 1990년 가을 고양군 일대를 물바다로 만든 한강 제방 붕괴 사태다. 당시 고양군민으로 살았던 이들이라면 이 사태에 대한 기억이 뇌리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을 것이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다. 당시 육군 이등병 신분으로 내무반 평상 끝선에 각 잡고 앉아있다가 “한강제방이 터져 고양군 일대가 물에 잠겼다”는 TV 뉴스 멘트를 들었던 충격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하지만 한강을 따라 튼튼한 자유로가 둘러지고, 새로운 도시가 건설된 이후 이사 온 이들에게 1990년 고양군 수해에 대해 알고 있냐고 물으면, 대개 “그런 일이 있었어?”라는 물음이 되돌아온다.  

여러 측면에서 고양 역사의 분기점이 된 ‘1990년 한강제방 붕괴’ 사태를 당시 고양신문은 어떻게 기록했을까. 다급하고 숨가빴던 그날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보자.  

일찌감치 등장한 수해 우려 

1990년 고양신문에 등장하는 첫 호우 소식은 6월 21자 신문에 게재된 사진 한 장이다. ‘물에 잠긴 벼’라는 제목의 포토뉴스를 통해 “논의 배수로 점검과 벼에 앙금이 묻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당부를 전했다. 이어 28일자 신문에서는 고양군 각 읍면에서 보유하고 있는 양수기를 무료 지원해 농경지의 물을 퍼내는 사진이 실리기도 했다. 당시 고양신문 독자 다수가 농민이었던 점을 고려해보면, 신속한 수해 상황 보도는 매우 중요한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7월 첫 주 신문에는 1면 머릿기사로 ‘폭우피해 2억300만원, 농경지침수 2200헥타르, 사망 1명’ 소식을 전하며 “본격 장마 시작 전 근본 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는 우려를 전했다. 구체적으로 “고양군은 한강 하류인 관계로 한강 수면이 올라가면 유수에 장애를 받아 침수 우려가 높아지고, 특히 상대적으로 저지대인 원당읍, 일산읍, 지도읍, 화전읍, 송포지역의 침수가 우려된다”고 분석했다. 마치 다가올 커다란 재해를 예감하는 듯 말이다.

한강제방 붕괴 사태 다음날 발행된 고양신문 1면. 재해 소식을 사진과 함께 신속히 보도했다. 
한강제방 붕괴 사태 다음날 발행된 고양신문 1면. 재해 소식을 사진과 함께 신속히 보도했다. 

고양군 대부분 지역 ‘물바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9월 둘째 주 고양신문은 ‘물바다 일산·지도’라는 간결한 헤드라인을 1면에 달았다. 긴 제목이 필요 없었다. 말 그대로 물바다였다. 부제는 ‘일산·지도 등 고양군 대부분 침수, 군부대 고립지역 주민 457명 구출, 떠내려가는 가축, 다 된 농사 하늘도 무심’이었고, 그 아래에는 가옥과 비닐하우스 지붕까지 물이 들어찬 모습, 물에 잠겨 방송이 중단된 능곡송신소 대형안테나, 고무보트를 타고 인명구조에 나서는 특공연대장병들의 사진이 실렸다.

상황은 이랬다. 9월 9일 새벽 쏟아진 폭우에 경기중부 곳곳에 수해가 발생했다. 전국적으로 사망자와 실종자가 130여 명이나 발생했고, 11만 명의 이재민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 

비는 11일 밤에 잦아들었다. 모두가 한숨 돌리려던 12일 새벽 3시50분, 한강 하부 제방이 터져 고양군 일대가 물바다로 변했다. 둑이 붕괴된 위치는 행주대교에서 하류 방향으로 1.5㎞ 내려온 지점이었고, 붕괴 폭은 약 120m였다. 이 틈새로 황토빛 흙탕물이 무서운 기세로 밀려들어왔고, 평평한 지형을 따라 위로는 고양 땅의 마을과 농경지를 차례차례 집어삼켜 버렸다. 실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침수로 인해 처참한 모습으로 파손된 농촌마을 가옥들.
침수로 인해 처참한 모습으로 파손된 농촌마을 가옥들.

학교 대피소마다 이재민 가득

다행히 9일부터 쏟아진 폭우로 위험을 감지한 고양군 주민 일부는 11일 아침부터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 있었다. 하지만 미처 대피하지 못한 주민들은 가재도구 하나 챙기지 못하고 급하게 집을 빠져나와야 했다. 일부 주민들은 붕괴되지 않은 둑방 위나 축사 지붕, 콘테이너박스에 올라가 물이 차오르는 집과 농경지, 물살에 휩쓸려가는 가축들을 속수무책 바라보기도 했다.

행주리, 토당리, 신평리, 장항리, 주엽리, 대화리, 법곳리, 구산리…. 한강변을 따라 점점이 이어진 마을마다 수많은 주민들이 고립돼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날이 밝으며 시작된 고립지구 인명구조활동에는 군부대와 장병들이 앞장섰다. 가장 먼저 한강 하구 경계를 담당하는 부대가 대규모의 병력과 헬기, 모터보트, 고무보트 등을 총동원해 구조활동을 전개했다. 이어 특공연대와 공병대대가 투입돼 신속한 구조활동을 지원했다. 군 장병들의 기민한 ‘대피작전’ 덕분에 홍수에 고립된 주민 수백여 명이 구출됐다. 

이 과정에서 일부 농민들은 “목숨 같은 소와 돼지들을 두고 나갈 수 없다”며 축사 문을 붙들고 버티기도 했고, 다수의 토당동 주민들은 상대적으로 고지대인 삼성당언덕에 모여 물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고집하다가, 지도읍장과 특공연대장의 설득으로 대피소로 이동하기도 했다.     

대통령, 양당 총재 상황실 방문

이재민들의 대피소는 학교에 마련됐다. 일산읍 백마국교와 일산국교, 지도읍 능곡국교와 능곡중고교, 행신국교, 송포면 대화국교와 송포국교 교실마다 젖은 옷 한 벌만 걸친 마을 주민들이 가득찼고, 읍내 언덕에 자리한 능곡교회도 이재민들에게 교회 문을 열어줬다. 

다행히 비는 더 이상 내리지 않았고, 12일 저녁이 되자 조금씩 물이 빠지기 시작했다. 이재민들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이튿날인 13일부터는 본격적인 복구작업이 시작됐다. 군·관·민(지금은 민·관·군으로 적는 게 상식이지만, 당시에는 순서가 거꾸로였다) 합동으로 1500명의 1차 복구인력이 꾸려졌고, 중장비가 총동원돼 터진 한강제방을 긴급 복구하는 작업에 투입됐다. 

군청 상황실에 꾸려진 재해대책본부에는 오전부터 경기도지사와 국방부장관, 내무부장관, 건설부장관, 김영삼 민자당 대표, 김대중 평민당 총재의 방문이 줄을 이었고, 13일 오후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 상황보고를 받은 후 일산국민학교를 찾아가 이재민을 위로했다.   

일주일 후 발행된 고양신문 1면. 긴급 복구작업으로 임시 연결된 제방 모습을 사진으로 실었다. 
일주일 후 발행된 고양신문 1면. 긴급 복구작업으로 임시 연결된 제방 모습을 사진으로 실었다. 

수해가 남긴 상처 너무도 커 

일주일 후 발행된 9월 20일자 고양신문은 4개 면을 할애해 한강 제방 붕괴 사태 소식을 상세히 전했다. 1면은 ‘수해복구에 안간힘’이라는 제목과 함께 임시 복구로 맞닿은 한강제방 사진을 실었다. 

복구활동은 총력적으로 펼쳐졌다. 연일 수만 명의 군장병과 예비군, 민방위대원, 공무원, 학생, 주민들이 복구작업에 투입됐지만, 수해가 남긴 상처가 너무나도 커서 곳곳에서 안타까운 상황들이 벌어지곤 했다. 

대피소가 미처 수용하지 못한 이재민들은 제방 경사면, 또는 노천 고지대에 천막을 치고 노숙을 했다. 이들은 자기 손으로 삶터를 복구하려 애썼지만 식수도 씻을 물도 부족했고, 흙탕물에 젖은 쌀을 건져 밥을 짓는 열악한 환경에서 질병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복구작업 역시 난항이었다. 통신과 이동 여건이 미비해 동원된 인력과 장비를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일이 쉽지 않았고, 전국 각지에서 답지한 구호품 또한 수재민들에게 신속하게 전달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수해로 완파된 집에 돌아온 30대 농민이 음독자살을 기도하는 안타까운 일도 발생했다. 이 소식을 보도한 고양신문 기사는 “농촌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일체의 농기계를 갖추고 과학영농을 시도했던 젊은이”라고 소개하며 “수천만 원 상당의 농기계가 못쓰게 된 것을 비관해 자살을 기도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새벽부터 뛰어나가 생생한 현장취재

앞서 고양신문 당직기자는 11일 밤부터 침수에 대비해 일부 주민들이 미리 주민들이 대피해 있었던 백마국교, 일산국교, 대화국교 등을 순회하며 대피소 상황과 읍·면의 비상대비태세 밤샘취재를 이어가고 있었다. 기자가 취재를 마치고 군청 상황실로 돌아온 시각은 12일 새벽 1시30분. 폭우가 시작된 9일부터 나흘째 이어지는 철야근무에 지칠대로 지쳐있던 구청 공무원과 기자 본인은 “비가 그쳤다는 소식에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을 뿐, 2시간 후의 참변을 예측하지는 못했다”며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위기상황에서 침착하고 과감하게 구조활동을 펼친 이들의 활약상도 기사를 통해 소개됐다. 제방이 붕괴되던 새벽, 전화제보를 받고 현장으로 달려가 하루 종일 취재에 매달린 나진택 고양신문 편집국장은 2127부대 이동관리반장 고재곤 소령의 당일 행적을 생생하게 소개했다.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 새벽 4시 행주대교 길목에서 차량진입을 막고, 이곳 저곳 전화를 돌려 인명구조 장비와 병력 지원을 요청하고, 작전지도를 펼쳐 도착한 장비와 인력을 분산 투입하고, 지원된 헬기의 좌표를 불러주고, 컵라면으로 한끼를 때운 후 인력구조 상황을 지휘하고…. 고양신문 르포기사는 제방붕괴 첫날 고 소령의 발빠른 판단과 조치로 수백여 명의 이재민들이 안전하게 구조될 수 있었음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물속에 고립된 젖소들을 구출하기 위해 사투를 벌인 한 축산농민의 피눈물 나는 체험도 소개됐다. 인명안전이 우선이라며 막아서는 전경들과 몸싸움을 벌이면서 작은 배를 띄웠고, 소 한 마리당 20만원의 포상금을 내걸고 10여 명의 주민들을 동원해 기르던 젖소 20마리 중 13마리를 기적적으로 건져냈다. 하지만 이미 물을 많이 들이마신 젖소들은 수의사의 진료 한번 받지 못하고 10마리가 폐사했다. 기사 제목 그대로 ‘악몽의 그날’이었다.  

한강 철책길에 널어놓은 젖은 볍씨를 돼지들이 밟고 다니는 모습. 
한강 철책길에 널어놓은 젖은 볍씨를 돼지들이 밟고 다니는 모습. 

1930년대 축조, 60년 버틴 ‘대보뚝’

붕괴된 한강 하류 제방은 일명 ‘대보뚝’이라 불렸다. 대보뚝은 일제강점기에 축조됐다. 20세기 전반 최대의 피해를 남긴 홍수로 기록된 1925년 ‘을축년 대홍수’를 겪은 후 1930년대에 지도읍 행주리에서부터 송포면 구산리에 이르는 12㎞를 따라 자갈과 모래와 흙으로 쌓은 제방이 대보뚝이었다. 

대보뚝은 고양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고마운 제방이었다. 한강의 범람을 막아주는 둑이 만들어진 덕분에 지도읍과 일산읍과 송포면 일대의 드넓은 습지가 비옥한 농경지로 차츰 비옥한 농경지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축조 후 오랜 시간이 흐르며 제방의 안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수도권에 기록적인 폭우가 내렸던 1984년 여름에는 대보뚝의 붕괴 위험이 감지돼 많은 인원과 장비를 동원해 긴급 보강하며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후에도 불안을 호소하는 고양군민들의 목소리는 중앙정부까지 전달되지 못한 채 수년이 흐르다가, 결국에는 축조 60여 년 만에 둑이 무너지는 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한밤중에 들이닥친 사태라지만, 따져보면 예고된 재난이었던 셈이다. “서울 땅이었으면 진작에 대책을 세웠을 것”이라는 고양 사람들의 하소연이 억지소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지역신문 덕분에 ‘그날의 기억’ 전승

34년 전 고양신문 지면을 들춰보며 지역신문의 기능과 가치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사태의 경과를 정리하고, 현장을 스케치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고, 안타까운 사연을 소개하고, 수고한 이들의 활약을 조명하고, 원인과 전망을 분석한 고양신문 기사가 없었다면, 고양 역사의 중요한 변곡점이 된 1990년 한강제방 붕괴 사태는 공식 기록으로 남은 숫자 몇 개로만 기억됐을 것이다. 공동체의 기억 속에 사람의 체온을 담아내는 일, 지역신문이 해내는 소중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다음 연재에서는 1990년 한강제방 붕괴 사태가 어떻게 수습됐는지를 살피고, 그 사태가 남긴 지역사적 의미를 갈무리할 예정이다.  

※참고자료 : 고양신문 39호(90.06.13)~51호(90.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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