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북한산·북한산성(8) 고려 왕들의 북한산 행차

신앙은 불교, 정치는 유교 열망했던 고려 왕실
‘승가 신앙’ 성지 북한산 찾으며 사회통합 시도

북한산 바위굴에 모셔진 신라시대 승가대사석상
고려 문화 전성기 함께 한, 작지만 큰 문화유산     

북한산 비봉능선의 연봉들. 산자락을 따라 고려시대 왕들이 행차했던 대찰(大刹)들이 자리했었다.
북한산 비봉능선의 연봉들. 산자락을 따라 고려시대 왕들이 행차했던 대찰(大刹)들이 자리했었다.

[고양신문] 북한산의 이름과 우리민족의 산악신앙 이야기로 시작한 북한산·북한산성 스토리텔링연재는 북한산 일대를 두고 치열하게 펼쳐진 고대 삼국의 영토전쟁과 통일신라 사회를 통합하는 데 기여한 불교의 이야기를 짚었다. 아울러 백제 온조왕, 신라 진흥왕, 통일신라의 두 고승 원효·의상 등 북한산 곳곳에 설화와 흔적을 남긴 인물들도 살펴보았다. 마애불을 다뤘던 지난 시간에 이어 이번 시간에는 고려시대 전반기의 북한산 이야기를 정리해보자.

역사 이래 한반도 중부, 한강 유역의 진산(鎭山)으로 대접받아왔던 북한산이 본격적으로 역사의 중심으로 접근한 시기는 고려시대부터다. 한반도 동남쪽에 도읍을 둔 통일신라가 명운을 다한 후, 후삼국을 수습한 고려가 북한산을 지척에 둔 개경(개성)을 수도로 삼았기 때문이다.

개경 송악산 아래 거했던 고려의 왕들은 명승과 고찰을 품고 있는 북한산(당시 이름은 삼각산)을 종교적 성지로 삼아 자주 발걸음을 했다. 고려 왕들의 북한산행은 한편으로는 국가와 백성의 안녕을 비는 신심(信心)의 실천이었고, 한편으로는 강력한 왕권을 다지기 위한 정치적 행차이기도 했다.   

현대에 대규모로 중수(重修)된 북한산 승가사.
현대에 대규모로 중수(重修)된 북한산 승가사.

불교와 유교, 고려 왕실의 투트랙

고려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이중적인 성격을 가진 국가였다. 모두가 알고 있듯,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숭상했다. 팔만대장경을 비롯해 수많은 불교 문화재를 탄생시킨 시대가 바로 고려 아니던가. 하지만 불교를 섬기는 이면에서 끊임없이 유교적 국가체제를 앙망했던 이들이 바로 고려의 왕들이었다.

사실 이러한 이중적 딜레마는 고려 태조 왕건이 세상을 뜨기 전 유지(遺志)로 남긴 ‘훈요10조’에서부터 흔적을 드러낸다. 왕건은 훈요10조 첫 항에서 ‘나라의 대업은 반드시 부처의 힘을 입어야 한다’며 불교를 국교로 삼는다는 원칙을 천명했다. 하지만 마지막 항에서는 ‘옛 경전을 읽고 국가를 다스리는 일에 거울로 삼으라’는 권고를 끼워 넣는다. 여기서의 경전은 물론 중국의 유교 교과서인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말하는 것이니, 불교를 섬기면서도 유교적 통치 체제를 도모하라는 유언을 후대 왕들에게 남긴 것이다. 

이러한 통치 이데올로기적 이중성을 이해하려면 고려 권력의 이중성을 이해해야 한다. 사실 고려는 대내외적으로 명실상부한 한반도 유일의 통일왕국이었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왕과 각 지역 호족세력이 권력을 나눠 갖은 모양새로 출발한 국가였다. 각 지역 호족세력들을 묶어놓기 위해 왕건이 무려 스물아홉 명의 부인을 맞아들인 ‘불굴의 혼인 전략’을 구사해야만 했던 모습에서도 고려 왕실의 부실한 권력 지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고려 왕실은 선대로부터 계승된, 불교가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권위를 누구보다도 앞장서 섬기고 계승하는 모습을 보여줘야만 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호족세력의 기득권에서 벗어나 왕권 중심의 통치를 도모해야 했고, 그러려면 유교적 제도와 사상을 국가 경영의 시스템 안으로 정착시켜야만 했다. 4대 광종이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과 과거제(科擧制)를 도입한 것도, 5대 경종이 전시과(田柴科)를 통해 토지제도를 정비한 것도 불교를 기반으로 한 귀족제 국가에서 벗어나 유교적 이념에 바탕을 둔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를 완성하기 위한 시도였다.

승가대사좌상이 자리하고 있는 승가사 약사전 바위굴.
승가대사좌상이 자리하고 있는 승가사 약사전 바위굴.

북한산을 성지로 삼은 현종

하지만 고려 왕실의 시도가 정착되기 위해선 좀 더 많은 진통이 필요했다. 태조 이래 아예 고려 왕실의 전통으로 자리를 잡아버린, 복잡한 통혼(通婚) 전략의 폐해 때문이다. 하나같이 왕실의 외척이 된 호족들은 각자의 연이 닿아있는 왕손을 권좌에 올려놓기 위한 투쟁을 반복했다.

고려 8대 현종(재위 1009~1031)도 이러한 혼란기를 배경으로 왕위에 올랐다. 현종을 특별히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북한산 일대를 불교의 성지로 섬기는 왕실 전통을 열었기 때문이다.

현종의 불심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도드라진다. 그는 불교 행사인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를 대대적인 국가 행사로 베풀었고, 거란의 침략을 받았을 때 불심으로 국난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담아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조판을 명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현종은 북한산 일대의 여러 사찰을 후원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소중히 불심을 의탁한 사찰은 바로 북한산 승가사(僧伽寺)였다. 현종의 지원 아래 승가사는 대대적인 중수(重修) 불사를 진행해 명실상부한 대찰(大刹)로 거듭났고, 현종 이후로도 여러 왕들의 발길이 이어지며 국가 차원의 불교의례가 행해졌다.

현종이 이처럼 북한산의 절에 깊은 인연의 공덕을 쌓은 이유는 뭘까. 『성과 왕국』의 저자 조윤민 작가는 현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북한산 지역에서 승려 생활을 했던 불우한 성장과정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앞서 살펴본 고려 왕실의 복잡한 가계와 외척들의 정쟁 속에서 십대 초반의 대량원군(현종, 왕건의 손자 중 하나)은 북한산 신혈사(神穴寺)로 강제 출가조치를 당한다. 대권 후보 중 한 명을 제거하려는 외척세력은 심지어 자객을 보내 암살 시도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량원군의 목숨을 지켜 준 이들은 북한산 사찰의 스님들이었다. 결국 또 다른 세력의 쿠데타에 의해 왕위에 오른 현종이 자신의 운명을 지켜 준 북한산과 북한산의 사찰들을 특별한 애정으로 대했음은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승가 신앙의 중심으로 숭앙됐던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
승가 신앙의 중심으로 숭앙됐던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

‘승가 신앙’ 중심이 된 북한산 바위굴

현종이 북한산의 사찰 중에서도 특별히 승가사를 높이 여겼던 데에도 이유가 있다. 승가사 바위굴에 8세기 신라시대에 제작된 승가대사의 석상(僧伽大師 石像)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승가대사석상은 높이가 76cm에 불과한, 규모가 크지 않은 좌상(坐像)이다. 언뜻 보면 불상 같지만,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승가대사라는 고승을 형상화한 나한상(羅漢像)이다.

7세기 중반 당나라에서 명성을 떨친 승가대사는 8세기 들어 신앙의 대상으로 위상이 한껏 올라가 약사불(藥師佛)로 불리기도 했다. 약사불은 질병과 재앙과 같은 현세의 고통을 없애주고 안락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기복(祈福) 신앙의 대상이 되는 부처다. 이러한 ‘승가 신앙’이 동시대에 동쪽 끝 신라에까지 전해져 신라의 승려 수태(秀台)의 손에 의해 북한산 바위굴 아래 승가대사상으로 새겨진 것이다.  

300년이 흐르고 고려의 왕 현종은 승가대사상을 알현하고 배면에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광배(光背)를 봉헌한다. 현종은 북한산 바위굴의 작은 승가대사상을 왕이 직접 섬기고 받드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고려 땅 모든 백성들의 복과 안녕을 기원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민심을 얻고, 왕의 권위를 높이고, 고려사회를 통합하려는 현종의 강력한 의지가 발현된 형식이 승가 신앙이었고, 그 역사의 무대가 바로 북한산이었다.

현대에 대규모로 중수(重修)된 북한산 삼천사.
현대에 대규모로 중수(重修)된 북한산 삼천사.

불교·유교 조화 이룬 고려의 전성기

물론 현종 역시 국가 체제는 유교적으로 운영되기를 꿈꿨던 통치자였다. 한림원을 만들어 유학자들을 양산했고, 설총·최치원 등 신라시대 유학의 선구자들을 기리는 제례를 올리기도 했다. 또한 지방 행정구역을 정비하고, 거란의 침입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강감찬 장군이 귀주대첩의 빛나는 역사를 남긴 때가 바로 이 시기다.

이처럼 현종은 신앙적 차원의 불교와 통치 차원의 유교를 적절히 조율하는 방법을 부단히 고민하며 내부와 외부의 위기를 차례차례 극복하고 명실상부한 왕권 국가로서의 토대를 만들어냈다. 그 결과 고려는 현종 후기부터 9대 덕종, 10대 정종, 그리고 11대 문종에 이르는 60여 년의 기간 동안 왕권과 국권이 가장 융성했던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 시기는 국가 신앙으로서의 불교, 통치 이념으로서의 유교가 가장 조화롭게 공존했던 시기라고도 볼 수 있다.

북한산 불교 성지를 찾아가는 고려 왕실의 행차는 현종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13대 선종은 승가사를 비롯해 장의사, 인수사 등 북한산 여러 사찰을 찾아 불공을 드리고 재를 올렸다고 전해진다. 특히 자신의 할아버지 현종과의 인연이 전해오는 신혈사에서는 오백나한재를 올리기도 했다.

순천 선암사에 전해오는 대각국사 의천 진영(眞影).
순천 선암사에 전해오는 대각국사 의천 진영(眞影).

숙종과 함께 북한산 찾은 대각국사 의천

고려 왕실과 북한산과의 인연을 살피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1055~1101)이다. 고려 전기를 대표하는 고승인 의천은 송나라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와 교종과 선종으로 갈라진 불교계를 교종 중심의 입장에서 천태종(天台宗)으로 통합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송나라에서 수집한 800여 권의 불경을 정리해 「속장경」을 간행하기도 하고, 「신편제종교장총록」이라는 도서목록을 편찬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의천은 상당히 이색적인 이력을 역사에 남긴 장본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구리로 만든 엽전인 해동통보와 삼한통보 등의 제조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승려가 어떻게 국가의 개혁적인 경제정책에 개입할 수 있었을까. 의천의 출생신분을 알고 나면 궁금증이 사라진다. 그는 고려 최고의 문화적 황금기를 이끈 11대 문종(1046~1083)의 넷째 아들이었는데, 아들들 중 한 명이 승려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열한 살에 출가해 일찍부터 고려 불교계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의천은 아버지 뿐 아니라 형님들도 모두 왕위에 올랐다. 12대 순종, 13대 선종, 15대 숙종이 첫째, 둘째, 셋째 형이었다. 그러니 의천은 승려이면서 동시에 고려 왕실의 종교와 개혁정책을 담당하는 국정의 파트너였다.

대각국사 의천 역시 형인 숙종을 보좌하고 북한산 승가사를 찾아 재를 올리곤 했다. 또한 북한산 일대의 사찰들을 중수하는 일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숙종이 승가사에 들렀다 돌아오는 길에 옥에 갇힌 죄수를 사면하고, 가뭄이 들었을 때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이러한 사료들은 고려 왕실의 북한산 행차가 종교 의례인 동시에 백성들, 또는 귀족이나 관료들을 향한 매우 정치적인 이벤트였음을 방증한다.

하지만 중반 이후 고려의 운명은 혹독했다. 애써 구축한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 무신정권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뒤이어 몽골의 침입을 받아 결국에는 원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한다. 왕의 권위와 국가의 명운이 기울어감에 따라 북한산을 찾는 고려 왕실의 발길도 끊어져 버렸다.    

승가 신앙의 중심으로 숭앙됐던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
승가 신앙의 중심으로 숭앙됐던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

평범하고 인자한 승가대사의 미소

승가사 약사전 석굴 안에는 1300년 전 신라의 승려 수태의 불심이 빚어내고, 1000년 전 고려 왕들의 극진한 예우를 받았던 승가대사의 석상이 세월의 무게를 가벼이 뛰어넘은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공식 문화재 명칭은 ‘서울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보물 1000호)’이다. 머리에는 두건을 두르고, 이마와 목에는 주름이 잡혔고, 광대뼈가 돌출한 얼굴은 편안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상화된 부처의 모습이라기보다는 확실히 평범하고 인자한 선사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 평범한 미소가 호족과 외척, 귀족들의 욕망과 지속적인 줄다리기를 해야 했던, 그리고 북방 이민족의 연이은 침략에 맞서야 했던 고려 전기 왕들에게 커다란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그 위로가 유효했던 시절에 고려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길지 않은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투박한 화강암 돌덩이에 새겨진 승가대사의 형상이 새롭게 보인다.

▮참고문헌 : 『성과 왕국』(조현민, 주류성), 『북한산성 연구 논문집』(경기문화재단), 『종횡무진 한국사』(남경태, 그린비)

의상능선에서 바라본 백운봉과 만경대, 노적봉.
의상능선에서 바라본 백운봉과 만경대, 노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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