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북한산·북한산성 (5) 비봉 진흥왕순수비

4세기 이후 불붙은 삼국의 영토 전쟁
후발주자 신라, 중원의 패자(覇者) 급부상

정복지 순수(巡狩)하며 비석 세운 진흥왕
한반도 단일문화권 새 역사의 출발 알려

북한산 비봉에 우뚝 서 있는 진흥왕순수비. 진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고, 사진 속 비석은 동일한 형태로 제작된 모조비석이다. [사진제공=유영종]
북한산 비봉에 우뚝 서 있는 진흥왕순수비. 진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고, 사진 속 비석은 동일한 형태로 제작된 모조비석이다. [사진제공=유영종]

[고양신문] 지난주에 이어 북한산과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였던 한반도 고대 삼국의 영토전쟁 이야기를 이어가보자. 삼국시대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사실 한반도에는 마한(충청·전라), 진한·변한(경상), 낙랑·대방(한나라 직속 영토)등 많은 나라들이 존재했었다.
하지만 복잡했던 고대 지도는 4세기 이후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으로 정리됐고, 한강 유역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한 엎치락뒤치락 공방전을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백제의 근초고왕, 고구려 광개토대왕이라는 걸출한 정복군주가 차례로 등장하며 역사의 페이지를 장식한다. 하지만 최종 승자의 자리를 차지할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바로 북한산 비봉에 순수비를 세운 진흥왕이다.

백제 근초고왕, 고구려 광개토대왕영웅들의 전쟁

고대 삼국 중 가장 먼저 국가의 기틀을 완성한 나라는 대륙의 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는 위치에 있었던 고구려였다. 기원전 37년 주몽(朱蒙, 동명성왕)에 의해 건국된 고구려는 꾸준히 국력을 키워 4세기 초 한반도 북부와 남부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던 낙랑과 대방을 지도에서 지워버린다. 그리고는 한강 유역으로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백제와 처음으로 맞닥뜨린다.

하지만 처음부터 한강 유역에서 출발한 백제의 저력도 만만찮아 임진강을 방어선 삼아 고구려의 남하를 효율적으로 막아낸다. 이 무렵 등장한 백제의 영웅적 군주가 바로 근초고왕(近肖古王)이다. 근초고왕은 369년 선제 침공을 한 고구려군을 제압하고 오히려 평양성까지 밀고 올라가 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王)을 피살하는 전과를 올린다.

하지만 백제의 전성기는 길지 않았다. 선대왕들과는 차원이 다른 고구려의 정복군주,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을 말할 때 한반도를 넘어 만주와 요동지역으로 강역을 넓힌 성과만을 떠올리기 쉬운데, 한반도 남쪽 방향으로의 활약상도 눈부시다. 특히 한강 하구의 교두보 마련을 위한 관미성(關彌城, 강화도 북부) 전투에서는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군을 제압하는 인상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광개토대왕이 서막을 장식한 고구려의 남진 정책은 아들 장수왕(長壽王)으로 계승된다. 475년 장수왕은 한성백제의 도읍지인 위례성을 함락시키고 백제 개로왕(蓋鹵王)을 사살함으로써 100여 년 전 고국원왕이 당한 치욕을 곱절로 되갚는다. 백제로서는 웅진성(熊津城, 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하며 나라의 명맥을 이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일 만큼 치명적인 패배였다.

기사회생한 백제는 겨우 체력을 추스른 후 5세기 중엽 함께 힘을 합쳐 공공의 적 고구려의 남진을 막아내자면서, 그동안 동남쪽 변두리 나라로 치부했던 신라에 손을 내민다. 우리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연합전선 중 하나인 나제동맹(羅濟同盟)의 시작이다. 나제동맹이 지속된 100여 년이 진정한 의미의 삼국 정립(鼎立) 시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순수비에 새겨진 글자들은 진흥왕의 업적과 통치 이념을 보여주는 역사의 타임캡슐이다. [사진제공=유영종]
순수비에 새겨진 글자들은 진흥왕의 업적과 통치 이념을 보여주는 역사의 타임캡슐이다. [사진제공=유영종]

스물한 살 진흥왕, 백제 성왕의 목을 베다

비록 고구려, 백제보다 후발국가로 시작했지만 신라는 특유의 역동성과 개방성을 지닌 나라였다. 6개의 부족이 함께 박혁거세를 옹립한 건국설화와 박··(··) 3개의 성씨가 번갈아가며 왕위를 주고받은 초기 역사에서 보듯 신라는 다양한 군소 세력들이 연합해 출발한 정치 집단이었다. 또한 고구려와 백제에게 정벌된 옥저, 동예, 말갈, 낙랑, 마한, 가야의 유민들을 효과적으로 흡수하며 한반도 토착 문명의 결집을 이룬 나라도 신라였다.

신라의 서광은 6세기의 개막과 함께 찾아온다. 지증왕(智證王)대에 비로소 이라는 호칭을 정착시키고, 사로국(斯盧國) 등 다양한 명칭이 혼재했던 국가 이름도 신라(新羅)’로 확정한다. 여세를 몰아 아들 법흥왕(法興王)은 율령(律令)을 제정하고 관직서열을 정리했으며, 불교를 받아들임으로써 대륙에서 전파된 선진문명권 입장 티켓을 끊게 된다. 앞선 두 나가라 수세기에 걸쳐 도달한 진도를 50여 년 동안 압축적으로 이뤄낸, 그야말로 비약적인 성장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등장한 불세출의 영웅이 바로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이다.

진흥왕은 고구려 광개토대왕, 서양의 알렉산드로스와 비견할만한 청년 정복군주다.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즉위한 진흥왕은 열일곱 살에 모친이 섭정을 끝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정복군주의 본색을 드러낸다. 그의 첫 번째 목표는 놀랍게도 한반도의 중심인 한강 유역과 북한산 일대를 손에 넣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나제동맹을 깨 버리자!”

물론 이러한 속마음을 처음부터 드러내진 않았다. 당시 백제를 이끈 왕은 고토 회복의 기치를 차근차근 추진하던 성왕이었다. 성왕은 아들보다도 어린 동맹국의 군주 진흥왕과 손을 잡고 고구려와의 전쟁을 시작한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백제는 꿈에도 그리던 한강 하구를 되찾고, 신라는 지금의 강원도 일대의 고구려성 10개 군을 처음으로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산전수전 다 겪은 성왕이었지만 스무 살도 안 된 진흥왕의 야심은 눈치 채지 못했던 모양이다. 553년 신라는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하류로 기습적으로 진격해 오늘날 경기도 광주땅에 교두보를 마련한다. 뒤늦게 사태를 감지한 성왕은 이듬해 대가야와 합세해 군사를 이끌고 관산성(管山城, 지금의 옥천)으로 진격한다. 동지에서 얼굴을 바꾼 신라와 운명을 건 일전을 개시한 것이다.

하지만 승리는 신라, 그리고 진흥왕의 몫이었다. 어제의 혈맹이자 장인이기도 한(성왕은 관산성 전투 한해 전 자신의 딸을 진흥왕의 후궁으로 들어가게 했다) 성왕의 목을 베어버린 진흥왕은 거침없는 기세로 가야마저 정벌하고 한반도 중부지역의 패권을 확고히 거머쥔다. 이때 진흥왕의 나이가 겨우 스물 한 살이었다.

순수비 뒷면의 총알자국은 6.25전쟁 당시 교전을 벌이며 생긴 흔적이라고 한다. [사진제공=유영종]
순수비 뒷면의 총알자국은 6.25전쟁 당시 교전을 벌이며 생긴 흔적이라고 한다. [사진제공=유영종]

'신라가 정복한 땅만천하에 선포

진흥왕은 단순히 전쟁만 잘 하는 왕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탁월한 정치감각과 통치술을 보여주는 증거들을 돌(石碑)에 새겨 남겼다.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것만도 북한산 순수비(555), 창녕 척경비(561), 황초령·마운령 순수비(568), 단양 적성비 등 5개나 된다. 이밖에도 글자가 마모돼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파주 감악산비도 진흥왕 순수비일 가능성 높다는 의견이 최근 제기되고 있다.

순수비란 무엇일까. 순수(巡狩)라는 말은 왕이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사정을 살핀다는 의미다. 하지만 신라 진흥왕이 거행한 순수는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태평성대의 순행(巡幸) 풍경과는 성격과 목적이 전혀 다르다. 영토전쟁을 통해 얻어낸 강역의 새로운 주인이 자신임을 만천하에 선언하는 상징적 퍼포먼스였고, 이를 대대에 남기려는 증표가 바로 순수비(巡狩碑)였던 것이다.

워낙 오랜 풍상을 겪다 보니 330자로 추측되는 전문 중 오늘날 판독 가능한 글자가 40%에 못 미치지만, 북한산 순수비에 드러난 글자들을 살펴보면 진흥왕의 의도가 분명히 읽힌다. 우선 정복군주의 힘과 권위를 숨기지 않는다. 진흥왕의 순행과 업적, 순행에 동행한 신하들의 이름에 이어 강력한 군사력에 의해 새로운 영토를 정복했으며, 앞으로도 정복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순수비를 세운 목적을 알고 나면 진흥왕이 굳이 험준한 북한산 바위봉우리에 올라 비석을 세운 까닭이 저절로 이해된다. 진흥왕이 차지한 한강 하구는 군사적 요충지는 물론 드넓은 영토, 풍부한 물산, 그리고 대륙으로 향하는 최고의 해상 교통망을 아우르는 그야말로 한반도의 심장이었다. 그리고 그 귀중한 산하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일찍이 570년 전 백제를 건국한 온조가 올랐던 바위산이 거기에 있었다. 스물세 살 패기만만한 진흥왕의 벅찬 포부를 담아내고, 경쟁국들에겐 비통한 치욕을 선사하기에 더없이 좋은 자리가 북한산 봉우리 말고 또 어디에 있겠는가.

신라 진흥왕의 발자취를 따라 비봉을 등반한 고양신문산악회 회원들. [사진=김정호]
신라 진흥왕의 발자취를 따라 비봉을 등반한 고양신문산악회 회원들. [사진=김정호]

신라에 충성하는 자 보상이 있으리라

다른 면에서 순수비를 세운 또 하나의 목적은 새롭게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지역의 거주민들을 왕의 백성으로 만드는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 (), ()과 같은, 유교적 가치들을 담은 글자들은 새로운 백성들에게 새로운 정치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메시지였다.

순서상 가장 먼저 세워진 단양 적성비(丹陽 赤城碑) 역시 순수비는 아니지만, 진흥왕의 정복군주로서의 자질을 방증하는 또 하나의 유물이다. 지금의 충청북도 땅인 단양과 제천에서 고구려를 밀어낸 진흥왕은 신라에게 충성을 바치다가 목숨을 잃으면 유족들에게 보상을 하겠다는 약속이 새겨진 비석을 세운다. 요즘으로 치면 대 국민 여론전과 국가보훈처의 역할을 동시에 겨냥한 내용이라 하겠다. 진흥왕의 이러한 통치전략이 점령지역 주민들에게 효과적으로 스며들었으리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 없다.

세월이 흘러 서른다섯 장년이 된 진흥왕은 한반도 북부, 지금의 함경도 일대까지 정복자의 말발굽을 치고 올라간다. 그리고 개마고원으로 들어서는 고갯마루 두 곳에 또 다른 순수비를 세운다. 바로 황초령순수비(黃草嶺巡狩碑)와 마운령순수비(摩雲嶺巡狩碑). 한반도 북부의 맹주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내려다보는 높이까지 영토를 확장한 것이었다.

이처럼 진흥왕이 세운 여러 비석들은 강력한 왕의 권위를 과시하고, 전쟁의 공포에 시달렸을 주민들에게 새로운 통치자의 은덕을 베풀고, 몽매한 백성들을 국가가 제시하는 새로운 문화로 교화하겠다는 의미를 모두 아우르고 있다.

1972년, 국보3호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기고 있는 모습. [이미지출처=대한통운 블로그]
1972년, 국보3호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기고 있는 모습. [이미지출처=대한통운 블로그]

진흥왕의 웅지(雄志) 서린 북한산 비봉

진흥왕이 북한산 비봉에 세운 순수비가 영험한 힘을 발휘했던 것일까. 이후 신라는 여러 차례의 고비를 겪으면서도 단 한 차례도 한강 유역을 빼앗기지 않고 굳건하게 지켜낸다. 또한 순수비를 통해 천명한, 점령지 주민들을 신라의 백성으로 흡수하는 기조 역시 통일을 완성하는 시기까지 내내 이어진 결과 7세기 중엽 드디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다.

이처럼 낙동강을 중심으로 성장한 한반도 토착문화권, 그리고 중국과의 교역로를 기반으로 하는 한강 유역 문화권을 맨 처음 하나로 묶어낸 진흥왕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1500년 동안 전개된 한반도 단일문화권의 주춧돌이 마련된 것이다.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는 1963년 국보 제3호로 지정됐다. 이후 1972년 경복궁 근정전 회랑으로 옮겨졌다가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다시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비석이 있던 북한산 비봉 꼭대기에는 오늘날 동일한 모양의 모조비석이 세워져 찾는 이들을 맞고 있다.

비봉에 올라서면 21세기 세계적인 국제도시로 성장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그리고 역사의 굽이를 유유히 적셔내려 온 한강의 장대한 풍광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 봉우리 가장 높은 곳에 서면 고대 한반도 역사의 전환점이자 한반도 단일문화권의 출발점을 알리는 화강암 비석을 세웠던, 1500년 전 젊은 영웅의 웅대한 심장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참고문헌 : 북한산성의 가치 재조명, 북한산성 연구논문집(경기도·경기문화재단), 성과 왕국(조윤민, 주류성), 종횡무진 한국사(남경태, 그린비)

비봉에 서면 한반도의 심장 서울과 한강 하구 일대가 한눈에 조망된다. [사진제공=유영종]
비봉에 서면 한반도의 심장 서울과 한강 하구 일대가 한눈에 조망된다. [사진제공=유영종]

 

 

관련기사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