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북한산·북한산성 (2) 북한산의 이름들

비류·온조가 새로운 도읍지 살폈던 ‘부아악’
삼국시대 한산(漢山), 한강유역 통칭하는 지명
고려시대 개성에서 바라본 세 뿔 ’삼각산’
한강 이북 대표경관에 계승된 당당한 이름 ‘북한산’

노고산 매미골누리길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북한산 연봉들의 장엄한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왼쪽부터 백운봉, 원효봉, 노적봉과 기린봉이고 오른쪽으로는 의상봉과 용출봉이 치솟아있다.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산, 북한산이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값진 축복인가.
노고산 매미골누리길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북한산 연봉들의 장엄한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왼쪽부터 백운봉, 원효봉, 노적봉과 기린봉이고 오른쪽으로는 의상봉과 용출봉이 치솟아있다.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산, 북한산이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값진 축복인가.

[고양신문] 휴일 아침, 거실 커튼을 여니 하얀 눈 세상이다. 첫 눈 치고는 제법 풍성하게 내렸다. 지난 해 눈구경 한번 못하고 겨울을 보낸 때문인지 백색 세상이 더 반가웠다. 문득 북한산은 지금 어떤 풍경일까 궁금해졌다. 하얀 눈을 머리에 얹은 백운봉과 만경봉과 노적봉이 보고 싶어 좀이 쑤셨다. 차를 몰고 북한산을 향해 달려갔지만 아뿔싸, 기상특보가 내려지면 입산이 금지된다는 사실을 깜빡했다.

새로 시작된 한 주, 바쁜 일상을 챙기느라 잊고 지내다가 하늘이 맑게 갠 목요일에 또다시 북한산이 생각났다. 오늘 같은 날씨라면 북한산을 볼 수 있겠지?

또다시 차를 몰고 달려가 북한산과 마주한 노고산 기슭 매미골누리길을 올랐다. 전망대에 도착하자 눈앞에 장쾌한 풍경이 펼쳐진다. 왼쪽으로는 원효봉과 백운봉 노적봉이, 오른쪽으로는 의상봉과 용출봉과 증취봉이 조망되고, 아래쪽에는 수문에서부터 대서문까지 완만한 비탈을 따라 올라간 성곽의 곡선도 선명하다. 움츠러들었던 마음을 채워주고도 남는 풍경이었다.

이름만 떠올려도 그리워지는 산,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차오르는 산. 많은 이에게 북한산은 그런 산이리라. 스토리텔링 북한산·북한산성 두 번째 시간에는 이 산을 불렀던 몇 가지 이름들을 살펴보려 한다.

동장대가 자리한 시단봉에서 바라본 경관. 중앙에 만경대와 백운봉이 겹쳐 보이고, 왼쪽은 노적봉, 오른쪽은 인수봉이다. [사진제공=유영종]
동장대가 자리한 시단봉에서 바라본 경관. 중앙에 만경대와 백운봉이 겹쳐 보이고, 왼쪽은 노적봉, 오른쪽은 인수봉이다. [사진제공=유영종]

이 산의 처음 이름은 뭐였을까

옛 사람들은 이 산을 뭐라고 불렀을까. 북한산의 옛 이름을 말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기록은 조선 중종 때 편찬된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다. 책에서는 북한산의 조선시대 이름 삼각산에 대해 양주 경계에 있으며, 화산(華山)이라고도 하고, 신라 때는 부아악(負兒岳)’이라고도 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이어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비류, 온조가 남쪽으로 내려와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 살 만한 땅을 찾았으니, 바로 이 산이다라는 대목도 나온다.

비류와 온조의 이야기에는 신화 시대의 잔영과 역사 시대의 여명이 함께 아른거린다. 북한산 우뚝한 바위를 딛고 서서 사방을 둘러보며 새로운 국가를 열 상서로운 터를 찾는 비류와 온조의 모습이 마치 고대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머릿속에서 그려진다.

지명사전을 찾아보면 부아악의 뜻을 삼각산 인수봉이 아기를 업은 것 같은 형상인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옛 이름 부아악은 현대인들에게도 다양한 영감을 준다. 어떤 이는 북한산이 수도 서울을 아기처럼 귀하게 품은 산이라 말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아기를 업은 바위 형상이 잘 보이는 포인트가 어디인가를 찾아 나서기도 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과연 부아악이 이 산의 첫 이름이었을까, 궁금증이 인다. 30개가 넘는 봉우리들을 거느린 거대한 산의 이름을 봉우리 하나의 모양에서 가져왔다는 게 자연스럽지 않다는 느낌도 든다. 우리나라 옛 지명을 연구하는 이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큰 산이나 강이나 고을마다 본래의 우리말 옛 이름이 있었는데, 이 땅에 한자문화가 유입된 이후 옛 이름들을 발음이 비슷한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전혀 다른 뜻과 해석이 덧붙여진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렇다면 부아악과 화산이라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는 우리말 이름은 또는 로 좁혀볼 수 있다. 북한산의 모양을 보면 정말 솟구치는 불처럼도 보이고, 우뚝한 뿔처럼도 보이기 때문이다. 이 이름을 한자로 적다 보니 발음이 유사한 부아라는 이름이 나왔고, 뜻을 따라 ()’로 썼다가 같은 발음의 ()’로 변천됐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한자가 들어오기 전부터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이 지금의 북한산을 정확히 어떤 이름으로 불렀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어쨌든 지구상에 음성언어가 등장한 지는 7만 년이 됐고, 문자언어는 기껏해야 수천 년이니, 북한산은 아주아주 오랜 세월동안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름으로 불렸을 게 분명하다. 그게 불뫼였건 뿔뫼였건,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이름이었건 말이다.

백운봉과 만경대 사이로 인수봉이 보인다. 뿔처럼 솟은 세 봉우리의 모습에서 '삼각산'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 [사진제공=유영종]
백운봉과 만경대 사이로 인수봉이 보인다. 뿔처럼 솟은 세 봉우리의 모습에서 '삼각산'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 [사진제공=유영종]

하늘로 치솟은 세 개의 뿔, 삼각산

북한산이 삼각산(三角山)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것은 고려시대부터다. 이름의 유래는 자명하다. 고려의 수도 개경, 지금의 북녘땅 개성에서 북한산을 바라보면 말 그대로 세 개의 뿔이 솟은 모양이기 때문이다. 개성까지 갈 것 없이 경기 북부지역, 파주나 연천에서도 인수봉, 백운봉, 만경봉이 하늘을 찌를 기세로 솟아있는 형상을 선명히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고양시 덕양구, 또는 서울 은평구 방향에서 보면 인수봉이 백운봉 뒤로 숨어 보이지 않는다. 대신 만경봉 우측의 노적봉이 남은 하나의 뿔을 채워준다. 이쪽에서 보나 저쪽에서 보나 삼각은 삼각인 셈이다.

물론 삼각산의 연원에 대해 다르게 유추하는 이도 있다. 삼각산의 어원이 원래 쇠뿔산(牛角, 소의 뿔)’인데 쇠뿔산이 한자로 표기되는 과정에서 세뿔산(三角山)’으로 변했다는 견해다.

어쨌든 고려시대 이후 삼각산은 이 산을 지칭하는 대표적인 이름으로 확고히 자리 잡는다.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북한산(北漢山)’이라는 이름이 삼각산과 함께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이 산에 북한산성이 축조된 18세기부터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북한산이 행정적 지명으로 완전히 굳어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삼각산이라는 이름은 북한산보다 더 깊고 풍성한 역사적 문화적 이력을 품은 이름이다. 김상헌이 청나라로 끌려가며 지었다는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로 시작하는 시조처럼 조선시대의 많은 문학작품과 문헌 속에 삼각산이라는 이름은 수없이 등장한다. 그래서일까. 공식 지명이 아닌 작명이나 상호, 또는 문학작품에서는 지금도 삼각산이 선호되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오늘날에도 삼각산이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있다. 2003북한산이 아닌 삼각산이 자연유산 명승 10호로 지정된 것이다. 다만 명승 삼각산의 범위는 북한산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로 구성돼 있다고 명시돼 있다. 그러니까 북한산 권역 전체는 국립공원이지만, 그 중 3개의 봉우리 부분은 별도로 명승으로 지정·관리하고 있다는 얘기다.

한강 이북 드넓은 땅 통칭했던 북한산

이제 이 산의 오늘날 공식 명칭인 북한산(北漢山)이라는 이름에 대해 알아보자.

앞서 북한산이라는 이름이 18세기부터 보편적으로 쓰였다고 말했지만, 사실 이 이름이 등장하는 시기는 훨씬 오래전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인종 때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는 개루왕 5(132) () 월에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쌓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앞서 소개한 비류와 온조 이야기에서도 한산(漢山)’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이러한 문헌들을 근거로 북한산성과 관련된 대부분의 책자나 안내문들이 지금의 북한산성 자리에 백제시대부터 산성이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백제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있던 무렵을 배경으로 등장하는 한산(漢山), 북한산(北漢山), 북한산성(北漢山城)이라는 지명은 지금의 북한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간단히 설명하면 옛 문헌에 나오는 삼국시대의 북한산은 한강 이북의 넓은 지역을 아우르는 보다 큰 공간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학자들마다 개루왕이 쌓았다는 백제 북한산성의 위치를 지금의 북악산이나 세검정 부근, 또는 아차산성 근처로 보기도 하고, 임진강 주변 어딘가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처럼 한강 북쪽의 어느 산성을 가리키는 삼국시대 북한산성의 위치를 두고 의견이 분분한 상황인데, 어쨌든 지금의 북한산 일대는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할 때 그 후보에서 멀어지고 있는 분위기다. 지금의 북한산이나 북한산성 터에서 백제시대의 흔적이나 유물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옛 문헌의 북한산성의 위치가 지금의 북한산이 아니라는 견해에 힘을 보태고 있다.

지축지구와 은평뉴타운을 연결하는 지축교에서 바라본 북한산. 인수봉 대신 노적봉이 삼각뿔의 하나를 채워주고 있다. 2000년대 후반 조성된 뉴타운 아파트 높이가 북한산을 가리지 않을 정도여서 천만 다행이다. 반면에 최근 지어진 지축지구와 삼송지구의 아파트들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높이로 북한산의 조망을 차단하고 있다.
지축지구와 은평뉴타운을 연결하는 지축교에서 바라본 북한산. 인수봉 대신 노적봉이 삼각뿔의 하나를 채워주고 있다. 2000년대 후반 조성된 뉴타운 아파트 높이가 북한산을 가리지 않을 정도여서 천만 다행이다. 반면에 최근 지어진 지축지구와 삼송지구의 아파트들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높이로 북한산의 조망을 차단하고 있다.

모두의 지명을 계승한 하나의 산

아마도 독자들 중에는 백제 개루왕이 쌓은 북한산성이 오늘날의 북한산성과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기자의 글을 읽으며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마당에 굳이 북한산성의 기원 연대를 축소하는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불편해 할 이도 있으리라. 하지만 세계유산 등재의 기본은 진정성이다. 아쉽더라도 아전인수의 유혹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객관적 사실이라는 이름의 돌덩이로 징검다리를 하나하나 놓아가며 다가가야 하지 않을까. 백제 개루왕이 쌓은 북한산성이 반드시 지금의 북한산성이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는 얘기다.

그런 시선으로 북한산이라는 이름을 다시 들여다보자. ‘은 우리말에서 아주 크다는 의미를 지닌다. 아주 크고 높은 창공은 '한울'(하늘)이고, 아주 크고 긴 강은 '한강'이다. 한산(漢山) 역시 한강 일대의 아주 크고 너른 땅과 산맥들, 그러니까 지금의 한강 북쪽과 남쪽 일대 전체를 가리키는 광역의 지명으로 출발한 것이다.

삼각산 일대가 북한산이라는 지명으로 불리게 된 것은 앞서 말했듯 조선 숙종 37(1711) 산성이 만들어진 게 결정적 계기가 됐다. 새로 축조된 산성은 한산 남쪽 남한산성(南漢山城)과 대비되도록 자연스럽게 북한산성(北漢山城)’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정리하면 이렇다. 삼국시대의 문헌에 나오는 북한산은 원래 한강 이북의 드넓은 땅을 통칭했었던 지명이었다. 하지만 역사가 전개되면서 한강 유역 곳곳에 도읍과 마을이 형성되고 지역마다 개별적인 이름들을 얻게 된다. 결국 한강 이북을 대표하는 상징 경관인 지금의 북한산이 광역의 지명으로 쓰이던 이름을 대표적으로 계승한 모양새가 됐다고 보는 게 실증적 사료에도 부합하고, 의미도 놓치지 않는 설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음 회에는 한산(漢山), 다시 말해 한강유역 일대를 놓고 펼쳐진 백제·고구려·신라 삼국의 영토 전쟁을 간단히 짚어보고, 그 싸움의 최종 승자가 북한산 바위 봉우리 위에 남긴 영예로운 징표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알면 알수록 흥미로운 산, 그 산이 우리 곁에 있다.

참고문헌 및 자료 : 북한산성의 세계유산적 가치정립, 고양의 문화유산(이상 고양시), 북한산성의 가치 재조명(고양시·경기문화재연구원), 북한산성 연구논문집(경기도·경기문화재단), 성과 왕국(조윤민, 주류성), 북한산(박인식, 대원사)

 

관련기사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