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북한산·북한산성 (6) 원효봉과 의상봉

저잣거리 포교하며 대중불교 열어제친 원효
구도 정진하며 평등한 세상 꿈꾸었던 의상
통일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 고통 어루만져

원효암, 상운사 향나무, 삼천사, 흥국사…
큰 스승 기리는 이야기 북한산 곳곳에 전승  

창릉천 사곡교에서 바라본 북한산 경관. 왼쪽 둥글고 넉넉한 봉우리가 원효봉이고, 오른쪽의 가파른 봉우리가 의상봉이다.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두 봉우리는 북한산과 북한산성이라는 불국토(佛國淨土)로 들어서는 이들을 맞이하는 관문이기도 하다.
창릉천 사곡교에서 바라본 북한산 경관. 왼쪽 둥글고 넉넉한 봉우리가 원효봉이고, 오른쪽의 가파른 봉우리가 의상봉이다.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두 봉우리는 북한산과 북한산성이라는 불국토(佛國淨土)로 들어서는 이들을 맞이하는 관문이기도 하다.

[고양신문] 북한산 등산을 몇 번이라도 다녀본 이들이라면 북한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불교(佛敎)적 이름을 가졌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문수봉(文殊峰)과 보현봉(普賢峰)은 이름 그대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의미하고 나한봉(羅漢峰), 나월봉(蘿月峰), 용출봉(龍出峰), 용혈봉(龍穴峰), 증취봉(甑炊峰) 등도 직·간접적으로 불교적 색채를 지닌 이름들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 봉우리들은 북한산 계곡을 폐곡선으로 두르고 있는 북한산성의 자연 성곽 능선을 따라 자리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불자들은 북한산과 북한산성을 하나의 거대한 불국정토(佛國淨土, 부처가 머무는 깨끗한 세상)라 말하기도 한다.

고대 신화를 그린 영화나 판타지 소설을 보면 속세와 구분되는 성스러운 영역으로 들어가는 관문은 대개 두 개의 높다란 기둥이나 성벽으로 묘사된다. 그 사이를 통과해야만 새로운 세상으로 진입할 수 있는 것이다. 북한산성이라는 산중 도성(都城), 또는 불국토의 초입에서도 두 개의 천연 관문을 만나게 된다. 북한산국립공원 입구에서 마주하는 왼쪽과 오른쪽의 우뚝한 봉우리, 바로 원효봉(元曉峰)과 의상봉(義湘峰)이다. 한반도에 전래된 불교를 ‘모든 백성의 종교’로 만든 두 인물,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의 위대한 이름을 선인들은 북한산의 일렬 풍경에 헌사한 것이다.

영토적 통일에 이은 정신적 통합

한반도 허리를 적시는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강원도 태백의 검룡소에 다다르듯, 우리나라 불교 사상의 마르지 않는 발원지는 바로 원효와 의상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면서 중국에서 전래된 선진 제도종교인 불교를 차례대로 받아들인다. 차원 높은 세계관을 품은 불교는 넓은 영토와 백성들을 통치하는 사상적 기반이자, 중국 대륙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문화적 가교였다.

지난 연재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대 삼국 통일의 영토적 토대는 한강 하구와 북한산 일대를 확고히 장악한 후 북한산 비봉에 올라 ‘순수비’를 세운 진흥왕이 닦았다. 그 결과 삼국이 150년 넘게 치른 치열한 전쟁은 신라가 한반도 통일의 주인공으로 등극하며 마무리된다. 

하지만 역사상 어떤 통일 국가도 백성들의 마음을 통합할 정신적 기반이 뒤따르지 못한다면 사상누각이 되고 만다. 통일신라 역시 서로 다른 정체성을 이어온 이질적 구성원들을 새로운 차원으로 통합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와 직면해야 했다.

이러한 시기에 등장한 인물이 바로 원효대사(元曉大師)와 의상대사(義湘大師)였던 것이다. 통일신라라는 새로운 그릇에 새로운 불교를 채워 넣은 원효와 의상은 하늘이 내린 축복 같은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원효와 의상이 밑돌을 놓은 대중불교의 전통은 고려와 조선, 그리고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1400년 시간을 관통하며 우리나라 불교의 근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부산 범어사 불화에 그려진 의상(왼쪽)과 원효의 초상.
부산 범어사 불화에 그려진 의상(왼쪽)과 원효의 초상.

원효의 무애행, 의상의 정도

삼국의 통일 전쟁이 정점으로 치닫던 7세기 초에 8년 터울을 두고 태어난 원효(617~686)와 의상(625~702)은 기나긴 전쟁으로 피폐해진 한반도 백성들을 위로하고 분열된 세상을 불교적 이상사회로 통합하는 일에 평생을 함께 정진한 동지였다.

하지만 구체적인 삶의 발자취는 전혀 다른 색깔을 보여준다. 두 사람의 등장을 알리는 가장 유명한 일화는 이른바 ‘해골물 사건’이다. 660년 무렵 당나라로 함께 유학을 가기 위해 당항진(黨項津, 오늘날 화성 인근 항구로 추정)으로 향하던 원효와 의상이 어느 무덤가에서 하룻밤을 묵는데, 한밤중에 목이 말라 바가지에 담긴 물을 달게 마시고 아침에 깨어보니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 원효는 “모든 것이 마음의 작용이구나!(一切唯心造)”를 깨닫고는 발길을 되돌려 독학의 길로 들어서지만, 의상은 처음 마음먹은 대로 유학길에 올랐다는 이야기다.

같은 경험을 하고도 제각각의 선택을 한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성향은 이후의 생애 내내 이어진다. 원효가 종교와 세속의 경계를 거침없이 넘나드는 무애행(無碍行)으로 승속불이(僧俗不二)의 자유로움을 구가했다면, 의상은 출가자로서의 계율을 엄격히 지키며 화엄학(華嚴學)에 전념해 정도(正道)의 사표가 됐다.

북한산성 초입에서 올려다 본 원효봉. 어깨너머로 백운대와 인수봉의 모습이 보인다.
북한산성 초입에서 올려다 본 원효봉. 어깨너머로 백운대와 인수봉의 모습이 보인다.

갈등과 대립 넘어서는 ‘일심·화쟁’

원효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우리나라 불교 최고의 사상가이자 저술가다. 높은 학문적 경지로 불경과 사상에 통달한 그는 77부 150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작업을 통해 당대의 대승불교 사상을 집대성했다. 그가 정리한 「대승기신론소」와 「십문화쟁론」 등은 중국이나 일본은 물론,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학문적 성취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중들에게 미친 영향이었다. 이전까지 불교는 중앙 권력과 연결된 출가 승려들을 중심으로 국가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는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원효는 과감히 대중 속으로 들어가 백성들의 언어로, 백성들의 눈높이에서 종교적 위로와 희망을 설파했다. 저잣거리 걸인들과 어울리기도 했고, 천민들의 촌락을 누비며 함께 춤추고 노래했다. 태종무열왕의 딸인 요석공주와 연을 맺은(둘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훗날 이두를 만든 설총이다) 이후로는 승려라는 신분마저 벗어버리고 스스로를 소성거사(小性居士)라고 낮춰 불렀다.

원효대사가 저술한 '금강삼매경론'.
원효대사가 저술한 '금강삼매경론'.

성과 속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윈효의 무애행은 결코 개인의 방탕이나 유희가 아니었다. 기득권의 전유물이었던 불교를 전란으로 고통받고 신음하는 이 땅의 모든 이들의 종교로 돌려주기 위함이었다.

거침없는 실천과 전무후무한 학문적 업적을 동시에 성취해낸 원효의 사상을 대표하는 단어를 두 개만 꼽자면 바로 ‘일심(一心)’과 ‘화쟁(和爭)’이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모든 존재가 서로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은 하나의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일심사상’이고,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는 요소들을 좀 더 높은 차원에서 조화시키기 위한 방법론이 바로 ‘화쟁사상’이다.

북한산성 초입에서 바라본 의상봉의 모습. 뒤쪽으로 의상능선의 연봉들이 이어진다.
북한산성 초입에서 바라본 의상봉의 모습. 뒤쪽으로 의상능선의 연봉들이 이어진다.

새로운 세상 밝히는 사상의 등불 

원효와 달리 의상은 수행 정진, 제자 양성, 불사 건립과 같은 승려 본연의 삶에 충실한 일생을 보내며 이 땅에 화엄종(華嚴宗)을 연 고승으로 추앙받는다. 저술의 숫자는 원효에 비해 적지만, 간소하고 압축적인 표현으로 화엄사상의 고갱이를 정리한 「화엄일승법계도」. 「화엄경문답」 등을 남겼다.

하지만 의상 역시 경주 중심의 당대 기득권 불교와는 다른 길을 추구했다. 스스로 진골 경주 귀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양양 낙산사, 영주 부석사 등 왕도에서 멀찍이 떨어진 변방에 사찰을 건립해 새로운 불교를 세우는 일에 정진했던 것이다. 의상은 노비와 빈민 출신들도 거리낌없이 제자로 받아들였고, 왕실이 하사한 토지 경작이나 귀족들의 후원에 기대지 않고 탁발(托鉢)에 의존해 사찰 살림을 꾸리며 지역민과 일상적으로 접촉했다.

의상 '백화도량발원문약해'
의상 '백화도량발원문약해'

이처럼 의상은 구도자의 길을 엄밀히 지키면서도 기득권 교단과 골품제도라는 시대의 틀을 뛰어넘어 ‘불법(佛法) 앞에서의 만인 평등’이라는 혁신적인 사상을 실현하려 했다.

의상은 통일 대업을 승계해 최고의 권력을 구가했던 문무왕이 왕실 권위를 높이기 위해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추진하려 하자 “왕의 정교(政敎)가 밝으면 풀이나 흙더미로 성을 쌓더라도 백성들이 결코 넘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충언하며 날리며, 백성을 무력이 아닌 ‘정도(正道)에 의한 교화’로 다스릴 것을 당부하기도 한다.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통합의 길을 적극적으로 찾아가자는 원효의 화쟁사상, 그리고 불교적 평등에 근거한 정도사상은 전쟁과 패권의 시대를 매듭지은 통일신라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정신적 등불이 되었다.      

용출봉에서 바라본 의상봉(왼쪽)과 원효봉. 높이도 비슷한 두 봉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동반자의 길을 걸었던 원효와 의상의 생애를 닮았다.
용출봉에서 바라본 의상봉(왼쪽)과 원효봉. 높이도 비슷한 두 봉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동반자의 길을 걸었던 원효와 의상의 생애를 닮았다.

‘따로 또 같이’ 마주한 원효봉과 의상봉

북한산에는 최고봉인 백운봉(836.5m)을 필두로 700m가 넘는 봉우리들이 즐비하다. 원효봉과 의상봉은 높이만 놓고 보자면 500m에 불과한 높지 않은 봉우리들이다. 더 높고 우뚝한 봉우리들이 많이 있음에도 이 두 봉우리에 한국 불교의 가장 높은 고승 두 명의 이름을 붙인 의도는 자명하다. 앞서 보았듯 원효봉과 의상봉이 이 웅혼한 산에 입장하는 이들을 맞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북한산에 들어서려면, 또는 불국토에 도달하려면 가장 먼저 원효와 의상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이다.

따로 또 같이, 평행선이면서도 동반자의 생애를 살았던 원효와 의상처럼 두 봉우리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차분히 관망해보면 둥글둥글하고 푸근한 느낌의 원효봉은 저잣거리로 거리낌 없이 내려온 원효의 생애를 닮았고, 고고하고 장엄한 느낌의 의상봉은 선별된 출가자의 본분을 지킨 의상의 생애를 닮은 듯도 하다.

그런가 하면 완만한 봉우리를 지나자마자 깎아지른 듯 경사를 치고 올라가 염초봉과 백운봉에 닿는 원효봉 능선의 산세는 물 한 모금 마시고 깨달음에 도달한 원효의 도통(道通)을 보는 듯하고, 의상봉을 출발점 삼아 용출봉-용혈봉-증취봉-나월봉-나한봉-문수봉으로 이어지는 암봉들의 행렬은 무한한 연관관계를 통해 불법에 도달한다는 의상의 화엄사상을 보는 듯하다.  

원효봉 아래에 자리한 상운사. 원효대사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커다란 향나무가 서 있다.
원효봉 아래에 자리한 상운사. 원효대사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커다란 향나무가 서 있다.

수많은 이들의 바람과 염원 깃든 전승들

북한산 일대에는 원효대사와 연관된 여러 전승들이 전해 내려온다. 원효암 토굴에서 원효대사가 수도를 했다는 전설도 있고, 상운사와 삼천사도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그런가 하면 원효가 꽂은 지팡이가 뿌리를 내려 상운사 마당의 커다란 향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북한산에서 수행을 하던 원효대사가 건너편 노고산 기슭에 상서로운 기운이 서리는 것을 보고 찾아와 보니 약사여래(藥師如來) 부처님이 계셨고, 그곳에 흥성암(興聖庵)이라는 암자를 지어 오늘날 고양에서 가장 유서 깊은 고찰 중 하나인 흥국사(興國寺)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전승 일부는 역사적 근거를 증명하기 어려운 이야기들도 있다. 1400년의 세월이 흐르며 수많은 이야기가 보태지거나 창작된 까닭일까. 전국에 있는 수많은 고찰(古刹)들 중 원효와 의상을 창건의 기원으로 삼는 사찰들이 부지기수인 것도 사실이다.

원효대사가 수도한 곳에 세워졌다고 알려진 원효암. 규모가 작은 소박한 암자다.
원효대사가 수도한 곳에 세워졌다고 알려진 원효암. 규모가 작은 소박한 암자다.

하지만 고승들과 연관된 전승의 진위여부를 실증적으로 따지려 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대개의 종교적 서사는 사실의 언어가 아닌 소망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 전승이 팩트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바람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달리 해야 한다. 왜 이 땅의 불자들은, 그리고 백성들은 1400년 세월 내내 끊임없이 원효와 의상을 자신들의 시간과 공간으로 호출했을까. 아마도 그렇게 함으로써 원효와 의상을 늘 가까이에서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고, 그들의 법력이 ‘지금 이 곳’에도 깃들기를 염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과거 북한산을 찾았던 이들은 초입에서 마주치는 원효봉과 의상봉을 바라보며 어떤 마음을 품었을까를 상상해본다. 왕은 종묘사직의 안녕을, 선승들은 해탈과 열반을, 승병들은 전쟁 없는 태평성대를, 선비들은 안빈낙도의 안온한 나날을, 그리고 백성들은 배 곪지 않는 넉넉한 생애를 꿈꾸지 않았을까. 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는 바람에 실려 원효대사의 웃음소리, 의상대사의 독경소리와 함께 수많은 선인들의 기도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노고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원효봉과 의상봉.
노고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원효봉과 의상봉.
원효대사의 일화가 전해내려오는 한미산(노고산) 흥국사.
원효대사의 일화가 전해내려오는 한미산(노고산) 흥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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