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북한산·북한산성 (4) 고대 3국의 영토전쟁

고구려·백제·신라… 북한산·한강유역 차지하려 격돌
북한산 호위하는 파주·연천·양주, 군사유적 가장 많아
잊혀 있던 임진강변 고구려성… 뒤늦게 재조명
삼국시대 유적·이야기 간직한 덕양산과 고봉산

[고양신문] 지난 글에서 북한산을 중심으로 이어진 산악신앙의 시대적 변천사를 살폈었이번 주제는 훨씬 흥미진진하다.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 한반도 고대 3국의 영토 전쟁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기원도 기질도 다른 세 고대국가가 공존하기에는 한반도는 너무 좁았다. 최종 승자가 되느냐, 패자로 사라지느냐…. 명운을 건 치열한 싸움이 수 백 년 동안 전개됐고, 그 싸움의 향방을 결정짓는 궁극적인 목표지점은 바로 북한산을 진산(鎭山)으로 둔 한강 유역이었다.   

향로봉에서 바라본 서울의 모습. 고구려 신라 백제 고대 3국은 한반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북한산이 진산으로 자리하고 있는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사진제공=유영종]
향로봉에서 바라본 서울의 모습. 고구려 신라 백제 고대 3국은 한반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북한산이 진산으로 자리하고 있는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사진제공=유영종]

한강 하구를 차지하는 자, 천하를 얻으리라

우리 역사를 관통하는 몇 가지 원칙 중 하나가 ‘한강 하구를 차지하는 자, 천하를 차지한다’는 경구다. 물론 여기서의 ‘천하’는 한반도의 최종 승자라는 의미이다.

대체 한강하구가 왜 중요할까. 지도를 들여다보면 저절로 답이 나온다. 한눈에 봐도 한반도의 중심에 자리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통팔달의 물길이다. 도로망이 발달하기 어려운 고대에는 큰 강줄기가 곧 산업도로였고, 군사도로였다. 북한강은 지금의 강원·경기 북부지역을, 남한강은 강원·충청·경기 남부지역을 두루 거쳐서 양수리에서 합수(合水)한 후 남양주, 구리를 지나 드넓은 서울 땅으로 흘러든다. 한 마디로 한강 하구는 ‘가장 큰 강’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한반도 내륙의 물자와 인력이 모이는 센트럴 스테이션이었다.

나아가 한강, 임진강, 예성강이 서해 바다와 연결되는 경기만 북부지역은 당대 동아시아 문명의 중심지였던 중국 대륙과 연결되는 해상 진출로였다. 삼국이 지방정권 수준을 넘어 국제질서와 교류하는 고대 국가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한강 유역을 반드시 차지해야만 했던 것이다.

한강 유역의 첫 주인은 백제였다. 연재 첫 회에서 살펴본 것처럼, 백제 시조 온조왕(溫祚王, 재위 B.C18~A.D28)이 부아악(負兒岳, 북한산의 옛 이름)에 올라 사방으로 조망되는 지세를 살핀 후 새로운 도읍지가 들어설 땅을 낙점하는 장면이 기원전 18년의 일이다. 그렇게 시작된 국가가 한강 기슭 위례성(慰禮城)을 도읍지로 삼은 한성백제(漢城百濟)였다.

북한산 최고봉인 백운봉에서 바라본 서울. 2000년 전,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북한산 바위봉우리에서 바라본 모습은 어떤 풍경이었을까. [사진제공 =유영종]
북한산 최고봉인 백운봉에서 바라본 서울. 2000년 전,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북한산 바위봉우리에서 바라본 모습은 어떤 풍경이었을까. [사진제공 =유영종]

그런가 하면 한반도 남동쪽에서 가장 늦게 출발한 신라가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것이 6세기 중엽 젊은 정복 군주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이 한강 유역과 북한산 일대를 차지하고 난 이후부터다. 그러한 주도권의 전환을 보여주는 상징이 바로 북한산 비봉 바위 위에 우뚝 서 있는, 555년에 건립된 진흥왕 순수비(巡狩碑)다.

온조왕이 올랐던 바위산을 600여 년이 흐른 후 진흥왕이 또다시 올라섰다. 한강 유역을 놓고 기나긴 세월동안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받은 한반도 고대 3국 영토 전쟁의 스타트와 엔딩을 장식한 장소가 바로 같은 곳 북한산이었던 셈이다. 

북한산 북쪽 산하에 형성된 대치 전선

앞서 삼국 영토 전쟁의 목적이 북한산과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했지만, 정작 북한산에는 고대 삼국시대의 흔적으로 비정할 수 있는 직접적인 군사유적이나 유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태풍의 중심은 오히려 고요하고, 주변부의 비바람이 거센 법. 시야를 확장해 보면, 실제 삼국의 전투는 북한산과 한강 유역을 둘러싼 외곽 방어선에서 주로 치러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 영토 전쟁은 주로 남진하려는 고구려, 그리고 이를 저지하려는 백제, 또는 신라의 싸움이었다. 그러다보니 한강 유역을 방어하려면 북한산 북쪽의 산악지형과 하천지형을 활용해 방어선을 구축해야 했다.

이러한 정황은 경기도 각 지역에 분포해있는 산성, 토성, 보루 등 군사시설 관련 유적의 숫자를 비교해보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경기도 31개 시·군 중 군사시설 역사 유적이 가장 많은 지자체 1등부터 3등까지가 연천(25개), 파주(19개), 양주(18개) 순서다. 앞서 말한 북한산 북쪽을 둘러싼 산악지형, 그리고 하천 방어선인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인 것이다.  

이들 지역에 분포해있는 유적에서는 백제와 고구려, 그리고 신라 군사들의 흔적들이 뒤섞여 나오는 경우가 많다. 백제가 쌓은 성을 고구려가 차지하기도 했고, 고구려가 쌓은 보루를 신라가 빼앗아 시설을 보강한 경우도 발견된다. 그만큼 치열하게 뺏고 뺏기는 공방전을 반복했다는 방증이다.

탈환 목표지역 외곽의 자연지형을 중심으로 전선이 형성되는 전쟁 매커니즘은 오늘날까지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남과 북이 충돌했던 한국전쟁의 비극적인 시간을 돌아봐도,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지키기 위해(상대의 입장에서 보자면 점령하기 위해) 양보할 수 없는 대치 전선을 형성했던 지역이 고대 영토전쟁의 무대와 거의 비슷하게 맞물린다. 오늘날의 DMZ를 따라 고대의 군사 유적이 발견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한강 유역 북방의 천연 방어선 역할을 하는 임진강. 삼국시대의 치열한 전선이었을 뿐 아니라, 일부 구간은 오늘날에도 남과 북이 대치하는 군사분계선을 이룬다.
한강 유역 북방의 천연 방어선 역할을 하는 임진강. 삼국시대의 치열한 전선이었을 뿐 아니라, 일부 구간은 오늘날에도 남과 북이 대치하는 군사분계선을 이룬다.

임진강을 따라 분포한 고구려·신라 군사 유적 

고양시 북쪽을 둘러싸고 있는 파주, 연천, 양주에 산재한 수많은 군사관련 유적 중 가장 흥미로운 곳은 임진강과 한탄강 주변에서 발견되는 평지성(江岸 平地城)들이다. 연천의 고구려 유적 호로고루(瓠蘆古壘), 은대리성(隱垈里城), 당포성(堂浦城), 그리고 파주의 신라 방어시설인 칠중성(七重城) 등이 이에 해당한다.

임진강 주변 고구려 군사 유적들은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었다. 학자들조차 ‘남한 지역에 변변한 고구려 유적이 남아 있을 리 없다’고 여겼다고 한다. 그런데 90년대 들어 고고학자들이 만주의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게 됐고, 비로소 고구려 유적의 특징을 알아보는 안목이 생기면서 강가에 흩어져 있던 오래된 흔적들을 다시 보게 된 것이다. 그 결과 5세기 초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남진정책 이후에 형성된, 고구려와 신라가 임진강을 국경선 삼아 대치하던 시절의 유적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것이다.

임진강가 언덕에 우뚝 서 있는 연천 호로고루. 사진 뒤편 현무암으로 쌓은 성채는 고구려군이 쌓았고, 앞으로 돌출된 부분은 신라군이 만든 것이다.
임진강가 언덕에 우뚝 서 있는 연천 호로고루. 사진 뒤편 현무암으로 쌓은 성채는 고구려군이 쌓았고, 앞으로 돌출된 부분은 신라군이 만든 것이다.

특히 연천 장남면 고랑포구 인근에 자리한 호로고루는 임진강을 전선 삼아 치러진 삼국의 영토 전쟁을 상상해볼 수 있는 곳이다. 보루 아래 임진강은 호로병 모양의 잘록한 여울이 있어 호로하(瓠蘆河)라고 불렸다는데, 군사들이 배를 타지 않고 강을 건널 수 있는 지형이라 군사적 요충지가 어떤 곳에 자리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고구려 방식으로 쌓은 성벽 본체와 훗날 신라가 덧붙여 쌓은 성벽을 함께 비교하며 관찰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현무암 침식 협곡 곁에 우뚝하니 자리한 보루 언덕이 150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존재를 드러냈다는 사실이 신비로운 영감마저 불러일으키는 아주 매력적인 유적지다.

연천 호로고루 홍보관 앞에 우뚝 서 있는 광개토대왕비 조형물. 고구려의 영토 확장을 상징하기 위해 세워졌다.
연천 호로고루 홍보관 앞에 우뚝 서 있는 광개토대왕비 조형물. 고구려의 영토 확장을 상징하기 위해 세워졌다.

타임머신 뒤로 돌린 행주산성 석축 발견

고양 지역은 지형상 산지가 적고, 한강의 큰 물줄기가 펼쳐놓은 너른 평야지대였기 때문에 앞에서 살펴 본 파주와 연천, 양주와는 전혀 다른 군사 전략적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방어시설들이 홍수와 범람이 반복되는 큰 강가에 설치된 까닭에 아쉽게도 오늘날까지 남아있지 못했다. 그나마 일산과 덕양을 대표하는 산인 고봉산과 덕양산, 그리고 이산포 인근 멱절산에서 삼국시대 유적과 설화를 발견할 수 있다.

규모가 작은 멱절산 유적부터 보자. 법곳동 들녘 끝, 한강변 이산포 옆 작은 언덕인 멱절산에서는  2000년대 들어 발굴 조사를 실시한 결과 초기 한성백제 시대의 집터와 수혈유구·세발토기·장란형토기 등이 발견됐다. 학자들은 한강 하구 주요 포구 중 하나였던 이산포와 멱절산 언덕을 중심으로 삼국시대부터 물류 유통과 군사 방어 기능을 아우르는 시설들이 자리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행주산성이 자리한 덕양산에는 보다 확실한 삼국시대 군사 유적이 존재한다. 산 정상 바로 아래 경사면에서 7세기에 축조한 석축산성(石築山城)이 새롭게 확인된 것이다. 2019년 실시된 발굴조사에서는 석축과 함께 한성백제 시기의 옹기 조각과 신라시대의 토기, 선문과 격자문 기와 조각 등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이 연이어 출토됐다. 이 유물들은 행주산성이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기나긴 시간 동안 한강 하구에서 서울의 관문을 지키는 군사 전략적 요충지로 자리하고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행주산성이 자리한 덕양산 경사면에서 발견된 석축산성의 흔적. 역사의 시계를 과거로 훌쩍 끌어올렸다.
행주산성이 자리한 덕양산 경사면에서 발견된 석축산성의 흔적. 역사의 시계를 과거로 훌쩍 끌어올렸다.

그동안 행주산성은 일반인에게 조선시대 권율 장군과 인근 백성들이 하나가 되어 왜군을 물리친, 임진왜란 3대 승전지 중 한 곳으로만 여겨졌고, 남아있는 산성 흔적도 토성 구간이 전부였다. 이러한 인식은 1970년대 국가에 의해 고양 행주산성과 아산 현충사가 구국의 성지로 성역화 되면서 확고히 자리 잡았다. 그러나 석축산성과 유물들이 발견되며 행주산성의 역사는 과거로 천년 이상을 훌쩍 거슬러 올라가게 됐다. 

덕양산은 해발 125m에 불과한 야트막한 산이지만, 정상에 올라보면 비로소 진가가 보인다. 동남쪽으로 너른 한강을 따라 서울의 높고 낮은 지세가 한눈에 들어오고, 서북쪽으로는 서해로 열린 물길이 조망된다. 창릉천 물길이 거슬러 올라가는 북동쪽에는 서울과 고양의 진산 북한산의 당당한 풍채가 시선을 압도한다. 조선의 수도 한양을 호위하는 동쪽 외사산(外四山)으로 덕양산이 당당히 이름을 올린 이유가 저절로 납득된다. 이제 덕양산과 행주산성의 의미는 마주 보이는 북한산 경관과 함께 묶여 조선시대를 뛰어넘어 더 깊고 웅대한 과거로 확장돼야한다.

영토 전쟁이 남긴 고봉산 러브 스토리

고양에 남아있는 삼국시대 흔적의 마지막 무대는 일산의 중심인 고봉산(高峰山)이다. 고구려 안장왕(安藏王, 재위 519~531)과 백제 땅에 살던 한씨 성을 가진 미녀의 이야기는 고양에서는 나름 잘 알려진 고대의 러브 스토리다. 

안장왕이 태자 신분이었을 때, 적국의 사정을 염탐하기 위해 상인으로 변장하고 국경을 넘어 백제 땅 개백현으로 몰래 잠입한다. 그곳에서 우연히 대가집인 한(韓)씨의 딸 주(珠)와 만나 남몰래 사랑을 나누다가 “조만간 군대를 거느리고 돌아와 이 땅을 취하고 그대를 아내로 맞겠다”는 무책임한 약속을 하고 돌아간다. 홀로 남은 미녀 한주는 자신을 첩으로 삼으려는 개백현 태수의 회유를 받지만, 태자와의 약속을 굳게 지키다가 옥에 갇혀 죽음의 위협에 처한다.

이후 왕위에 오른 안장왕은 용맹한 장수 을밀과 함께 개백현을 공격하고, 여세를 몰아 남진해 한강 일대의 각 성들을 접수했다는 이야기다. 또한 안장왕이 개백현으로 진군해 올 때 한주가 산봉우리에 올라 봉화를 올린 산이 바로 고봉산이라는 이야기도 덧붙여진다.

안장왕은 광개토대왕~장수왕~문자명왕으로 이어지는, 고구려의 영토와 국력이 정점을 찍었던 전성기를 잇는 왕이다. 광개토대왕부터 안장왕에 이르는 시기는 고양 땅이 고구려와 백제 영토 전쟁의 중심에 있었던 때이기도 했다. 간략히 정리하자면 광개토대왕 때에는 고양 땅이 분단이 돼 있었는데, 일산지역은 고구려 땅으로 달을성현(達乙省縣)이라 불렸고, 능곡지역은 백제 땅으로 개백현(皆伯縣)이라 불렸다. 그러다가 장수왕이 한성백제를 함락시킨 전쟁에서 개백현은 고구려 땅으로 편입되어 왕봉현(王逢縣)이 된다.

하지만 나제동맹(羅濟同盟)을 등에 업은 백제 동성왕이 다시 개백현(왕봉현)과 달을성현을 탈환한다. 그리고 또다시 고구려 안장왕이 백제와의 영토 전쟁에서 승리하며 달을성현을 되찾는데, 바로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씨 미녀 이야기가 탄생한 것이다.

안장왕과 한주의 설화는 이야기 구조가 놀랍도록 빼닮은 춘향전의 모티브를 제공한 원전으로 여겨진다. 그런가 하면 적국의 여인이 다른 나라 왕자를 사랑해 자기 나라를 배신한다는 구조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와도 닮았다. 사랑을 위해 목숨도 조국도 버리려는 이는 왜 항상 적국의 아름다운 여인이어야 할까. 승자 중심, 그리고 남성 중심의 시각이 감지되는 대목이다.

무엇보다도 일국의 왕자가 적국에 첩자로 잠입하는 장면에서 보듯 안장왕과 한씨 미녀 이야기는 고구려와 백제의 사활을 건 영토 전쟁을 실감나게 상상할 수 있는 정보들을 촘촘히 담고 있다. 고양 땅, 그리고 북한산을 둘러싼 경기 북부 지역에서 긴 세월동안 치열하게 전개된 삼국의 영토 전쟁은 이처럼 유형의 역사 유적뿐만 아니라 흥미로운 이야기까지 다채로운 자산들을 우리에게 남겨줬다. 

▮참고문헌 : 『북한산성의 가치 재조명』(경기도·경기문화재단), 『고양의 지명 이야기』, 『고양의 역사와 인물』(이상 고양시) 『성과 왕국』(조윤민, 주류성), 『종횡무진 한국사』(남경태, 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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