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북한산·북한산성 (3) 산악신앙과 북한산

한민족 상고시대 역사를 연 산악신앙
하늘-땅  연결하는 축복·안녕의 근원
신라~조선까지 북한산서 국가제사 지내며
‘나라를 수호하는 산’으로 우러러
  

[고양신문] 매년 송년 모임을 갖는 고등학교 친구들이 있는데, 서울 남쪽에 사는 친구가 올해는 북한산 등산을 함께 하자는 제안을 했다. 기자가 북한산 기획 기사를 연재한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친구의 ‘이심전심’이 반가웠다.
몇 주 전 잡은 약속이었지만, 최근 5인 이상 집합이 금지된 탓에 모임을 취소해야 했다. 대신 최근 기자가 찍은 북한산 사진들을 단톡방에 올리며 ‘북한산은 그 자리에 잘 있으니 걱정 마시라’는 소식을 전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미뤄둔 산행을 꼭 실행하자는 약속과 함께 말이다.    

의상봉에서 바라본 백운봉과 만경대, 노적봉.  [사진제공=유영종]
의상봉에서 바라본 백운봉과 만경대, 노적봉. [사진제공=유영종]

산, 축복의 공간이자 경외의 대상

어느 책을 읽다가 “오늘날에는 즐기러 산을 찾지만, 옛 사람들은 우러르기 위해 산을 찾았다”는 대목이 가슴에 와 닿았다. 조상들이 산을 대하는 정서가 현대인들과 어떻게 다른가를 단적으로 설명해주는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연재에서는 우리 민족의 정서 깊은 곳에 자리한 산악신앙, 그리고 숭배의 대상으로서의 북한산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현대인들이 잃어버리고 사는, 위대한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이해하면 과거 이 땅에 살았던 이들이 북한산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았을 것인가를 상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형상 70%가 산인 우리나라에서는 어디에서든지 산이 보인다. 특히 고층 건물이 없었던 과거에는 일상 공간 대부분에서 산과 정서적 연관을 맺으며 살아갔던 것이다.
산은 많은 것을 베풀어준다. 농사짓는 곡식 외의 먹거리들은 대부분 산에서 얻었고, 땔감과 건축자재, 산짐승을 공급해 주는 곳도 산이었다. 무엇보다도 모든 생명의 근원인 물이 산에서부터 흘러내려왔다.
하지만 산은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깊은 산에 들어갔다가 길을 잃어 목숨을 잃기도 했고, 산사태가 산기슭 마을을 덮치기도 했으며, 호랑이와 같은 맹수가 사는 곳이었다.

이처럼 산은 축복의 공간인 동시에 인간이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두려움의 영역이었다. 웅장한 산을 섬김의 대상으로 삼는 ‘산악신앙’이 우리 역사 내내 이어진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산보다 더 크고 높은 존재는 햇빛과 비를 내리는 하늘이었다. 하지만 하늘은 너무도 멀고 높은 곳에 있었고, 상대적으로 산은 우리의 눈길과 발길이 닿는 곳에 존재했다. 높은 하늘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통로, 인간들의 간절한 바람을 하늘에 올려 보내는 신전이 바로 산이었다. 그래서 산신(山神)은 하늘(天神)과도 연결되고 땅(土地神)과도 연결되는 접속자였다. 

문수봉 인근에 있는 바위. 기도하는 손 모양을 하고 있어 신비로운 영감을 전한다. [사진제공=유영종]
문수봉 인근에 있는 바위. 기도하는 손 모양을 하고 있어 신비로운 영감을 전한다. [사진제공=유영종]

산악신앙 첫 머리 장식하는 ‘단군신화’

우리 민족이 상고시대부터 산악을 숭배했다는 기록은 중국의 역사서 곳곳에서도 찾을 수 있다. 『삼국지』(소설 『삼국지』가 아니다)에는 한반도 북부 국가인 예(濊)나라 사람들이 ‘산천을 소중히 여기고 호랑이를 신으로 여겨 제사를 지낸다’고 적고 있다. 산 속에 사는 짐승들의 제왕인 호랑이를 산신이 현현(顯顯)한 존재로 여겼던 것 같다. 같은 의미로 호랑이를 산군(山君)이라고도 불렀다. 

멀리 갈 것 없이 우리 역사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단군신화’가 바로 산악신앙 자체다. 하늘에 거하던 환웅은 태백산 산머리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와 산에 거한다. 천신(天神)인 동시에 산신(山神)인 셈이다. 환웅이 웅녀와 연을 맺어 태어난 단군 역시 이 땅의 첫 나라 고조선을 세운 후 종국에는 산신이 된다

삼국시대… 비 내리고 후손 점지하는 산신 섬겨

고조선 이후의 설화와 역사 기록 속에서도 산신신앙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고구려 동명성왕 설화에 등장하는 동부여의 왕 금와(金蛙)는 부여왕 해부루(解夫婁)가 ‘산천에 제사를 지내 얻은 아들’로 나온다.
고려시대 저술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고구려 사람들은 봄에 멧돼지와 사슴을 잡아 산천에 제사를 지냈다’, ‘고구려 왕이 아들이 없자 산천에 기도를 올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특히 한강유역을 가장 먼저 지배했던 백제 관련 기록에서는 산악신앙의 무대로 북한산이 직접 언급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여름에 크게 가물자 아신왕이 친히 횡악(橫岳)에 제사를 지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횡악은 바로 북한산을 일컫는 백제시대의 이름 중 하나다.
신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같은 책 ‘신라본기’를 보면, 신라인들은 산신이 노니는 숲(神遊林)을 복되고 신령한 땅으로 여기며 함부로 범접해서는 안 된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역사서인 『구당서』에도 ‘신라 사람들은 즐겨 산신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적고 있다.

비봉능선에 우뚝 솟은 사모바위. 학자들은 이곳에서 통일신라시대부터 산천제사가 열렸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진제공=유영종]
비봉능선에 우뚝 솟은 사모바위. 학자들은 이곳에서 통일신라시대부터 산천제사가 열렸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진제공=유영종]

북한산에서 산천제사 올렸던 통일신라

산악신앙은 이 땅에 불교가 전파되면서 위상과 형식의 변화를 겪는다. 불교는 산악신앙에 비해 훨씬 체계적인 경전과 신앙체계를 갖춘 종교였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깊은 심성에 각인된 산악신앙 전체를 대체할 순 없었다. 산악신앙, 산신신앙은 오히려 불교와 융합하고 공존하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 후기까지 지속돼 18세기에는 아예 산신을 섬기는 별도의 건물인 ‘산신각’이 사찰의 구성요소로 자리 잡는다. 사찰 곳곳에 그려진 불화에 등장하는 산신령의 모습 또한 산악숭배에 바탕을 둔 토착 신앙을 불교가 끌어안은 흔적을 보여준다.

융성한 불교문화를 꽃피웠던 통일신라는 경주에 도읍을 둔 나라이지만, 국가가 관장하는 산천제사를 올리는 주요 산 중 하나로 한강유역의 가장 큰 산인 북한산을 편제했다. 연구자들은 통일신라시대 산신제가 올려진 장소로 비봉과 승가사 일대를 주목한다. 또한 비봉능선의 가장 인상적인 바위인 사모바위 주변의 넓은 터를 제사터로 추정하기도 한다. 

다양한 요소들이 더해진 고려시대

고려시대 역시 불교가 국가의 정신과 문화를 지배했다. 그러면서도 이전부터 전승돼 온 산악신앙을 오히려 보다 풍성하게 계승하기도 했다. 오악(五嶽)과 명산대천의 산천신을 섬기는 행사였던 팔관회(八關會)는 고려시대의 가장 큰 국가 제사이자, 모든 사람들이 함께 즐기는 화려한 축제였다.
또한 고려시대는 중국의 성황(城隍)신앙이 유입되고, 도교적 영향이 전파되는 등 산신신앙에 다양한 요소들이 더해진 시기이기도 하다. 조선 세종 때 편찬된 『고려사』에는 ‘고려 왕 숙종이 삼각산으로 행차(1099년)를 했고, 행차를 하며 지나갔던 주변 명산대천의 산신들을 합쳐서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 나와 고양과 양주 일대의 산악신들을 관장하는 삼각산 산신의 위상을 짐작케 한다.  

백운봉 아래의 큰 바위 얼굴. [사진제공=유영종]
백운봉 아래의 큰 바위 얼굴. [사진제공=유영종]

북한산에 작위를 내린 태조 이성계

조선시대가 열리며 유교가 국가의 근간이 되면서 불교와 산신신앙은 공적 영역에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간에서 여전히 이어지는 산신신앙의 영향력을 인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개국 초기에는 한양의 진산(鎭山)으로 모셔진 북한산(삼각산)에 대해 국가 차원에서의 상징경관화 작업이 강력하게 진행된 것을 볼 수 있다.
개국 다음해인 태조 2년, 이조 이성계는 전국의 명산대천에 봉작(封爵)을 한다. 백성들이 신으로 섬기는 산신들에게 왕의 이름으로 작위를 내림으로써, 자연스럽게 새롭게 등극한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각인시키려 한 것이다. 당시 북한산(삼각산)에는 ‘나라를 수호하는 산’이라는 의미를 담아 ‘호국백(護國白)’이라는 작위가 내려진다. 물론 이러한 명산대천 봉작은 유학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비판을 받았고, 유교적 국가운영체계가 정비되며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북한산에서의 국가 제사는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특히 북한산(삼각산) 산신 제사는 한강의 강신, 한양 목멱산(지금의 남산) 산신 제사와 동시에 올려졌다. 수도 한양을 지키는, 특히 비를 내리며 국가의 안녕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3대 산천을 함께 숭앙했던 것이다. 
숙종 때에는 이전까지 불교, 도교, 무속 등의 요소가 혼합돼 내려오던 기우제의 절차와 형식을 유교식으로 완전히 정비한다. 유교식 기우제는 조선후기까지 쭉 이어진다.

더 큰 존재와 나를 연결해주는 산

산악신앙, 산신신앙은 산에 기대어 삶을 영위했던 우리 민족의 심성 깊은 곳에 자리한, 가장 오래된 신앙의 형태였다. 사회 집단이 발달하고, 국가가 성립되고,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꽃을 피우며 규모와 형식이 변모했다. 초기에는 씨족과 마을 단위에서 마을을 지켜주는 산신을 숭배하는 소박한 모습이었지만, 점차 고대국가가 기틀을 갖추면서 산악신앙 또한 국가의 정체성을 담보해주는 목적성을 덧입고 국가 차원의 의례로 형식과 내용이 격상된다. 그러나 근대의 물결과 일제강점기를 거쳐 경제발전이라는 국가적 총력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산악신앙은 청산해야 할 전근대적 정신문화로 내쳐졌다.

하지만 산에게 친근함과 경외감을 함께 바치는 산악신앙의 본질 자체는 여전히 우리들 심성 깊은 곳에 면면히 이어지는 게 아닐까.
과거로 돌아가 산을 종교적 대상으로 삼자는 얘기가 아니다. 선인들이 산을 하늘의 뜻과 땅의 기운을 이어주는 접속자로 여겼던 것처럼, 우리 존재의 근원을 좀 더 큰 존재와 연결하는 영감을 산에서 얻어 보자는 것이다. 깊고 울창한 북한산 숲에서 생명의 기운을 얻고, 장엄한 북한산 영봉(靈峰) 앞에서 경외감을 느끼는 마음은 누구에게 배워서 저장한 심성이 아니지 않은가.

▮참고문헌 및 자료 : 『북한산성 연구논문집』(경기도·경기문화재단) 중 ‘한국의 산앙숭배와 고대의 북한산’(신종원), ‘문헌에 나타난 삼각산의 산신과 기우제’(채미하), 『북한산성의 세계유산적 가치정립』(고양시)

기묘한 형태의 바위에 그려진 십자가. 장엄한 자연을 숭앙하는 심성은 제도 종교의 경계를 초월한다. 하지만 자연을 훼손하는 행위는 금물. 누군가가 열심히 지웠지만 흔적이 남고 말았다. [사진제공=유영종]
기묘한 형태의 바위에 그려진 십자가. 장엄한 자연을 숭앙하는 심성은 제도 종교의 경계를 초월한다. 하지만 자연을 훼손하는 행위는 금물. 누군가가 열심히 지웠지만 흔적이 남고 말았다. [사진제공=유영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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