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신문] 작년 초에 30년간 다니던 직장을 퇴직하고 소위 ‘백수’가 되었습니다. 오랜 노동으로 인해 야기된 약간의 누적된 피로와 그 노동의 축적물인 약간의 富가 주는 다소의 여유로 인해 1년이 넘는 노동의 휴식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제가 구태여 ‘노동의 휴식’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그것이 ‘활동의 휴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로 혼자서 하는 국내 도보 여행도 하고 책도 보고 세미나도 하고 토론도 하고 사람들과 술도 마시기도 하고 등등의 여러 활동들을 하게 되었으니까요. 오히려 노동에 몰두했던 수십 년 정규직 인간의 세월보다 더 많은 활동을 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 활동 중의 하나에 어느 정도 나이가 든 도시인들이 많이 경험해 보았을 ‘도시주말농장’이 있었습니다. 겨우 5평에 불과하지요. 다행히도 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고양시의 한 인문학 모임의 회원들과 함께하게 되어 소위 농사의 외로움(?), 고달픔(?)을 그리 느끼지는 못하였습니다. 대략 15명 내외의 분들이 함께했는데 중간에 이탈하는 분들이 거의 없이 꽤 만족한 상태로 한 해의 주말농사를 마친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로 40대~60대의 나이를 먹은 사람들이 겨우 5평의 농사, 경제적 효율성이 마이너스인 농사를 짓기 위해 자기 시간과 노력을 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창조성’ 혹은 ‘창발성’의 체험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손수 씨를 뿌리고 모종을 심고 그것들이 생명이 되어 자라는 것을 보고 느끼고 맛보는 과정은 아무리 그 규모가 작다고 해도 창조성 혹은 창발성의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20세기의 가장 독특하고 영향력 있는 철학자인 미셀 푸코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예술이 더 이상 개인들 혹은 인생과 관계를 맺지 않고 오로지 사물과만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이다.(중략) 개인의 인생은 모두 하나의 예술작품이 아닐까?" 예술에 있어 창조성은 자신의 존립 근거입니다. 반면 기계는 무한 반복 운동을 하다 어느 날 닳아서 폐기 처분이 되고 맙니다. 인생에도 어쩌면 한편에는 예술적 인생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기계적 인생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창조성은 우리가 ‘건강’이라는 것을 보는 관점에도 너무나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현대인들이 서로에게 혹은 자신에게 하는 덕담이나 다짐말 중 아마 가장 으뜸이 ‘건강’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아마도 ‘행복’이라는 말보다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건강이라는 말이 사실상 근대가 만들어낸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근대 이전에는 ‘건강’이라는 말이 없었고 영어 단어 헬스(health)의 어원은 신성함, 전체성, 치유의 뜻이 있어 종교적 의미가 강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의 삶이 창조적 예술작품이 되려는 노력이 없이 기계적 형태에 머물 때 그 사람의 신체가 튼튼하고 건강하다고 해서 ‘건강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또 어떤 사람의 삶이 창조적 예술작품과 같을 때 그가 장애인이거나 몸에 병이 있다고 해서 그를 ‘병든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창조성’은 아마도 우리가 소위 ‘건강한 삶’을 희망할 때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창조성이 결여된 인간은 니체가 말하는 소위 ‘허무주의적인 최후의 인간’이 아닐까요. 니체는 이렇게 말합니다. “최후의 인간은 열정도 없고 헌신도 하지 않는 무심한 존재다. 사는 데 지쳐버려 꿈도 꿀 수 없는 최후의 인간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은 채, 오직 안전과 편안만을 추구한다.(중략) 최후의 인간은 낮에도 즐겁지 않고 밤에도 즐겁지 않다. 그들은 건강을 염려한다. 최후의 인간은 눈을 깜빡이며 ‘우리는 행복을 발견했어요’라고 말한다.”
이규상 / 건강넷·청송주말농장 반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