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넷·고양신문 공동진행 건강도시 심층기획 ‘어떻게 나이들어야 할까’
학교에서 몇 발짝만 나오면 숲에 머물 수 있다니요…
아이들 환한 웃음이 마스크 밖으로 줄줄 새어 나오고
매일매일 찾을 수 있는 가까운 치유숲
마을숲 산책❸ 안곡습지공원
중산지구 개발로 사라질 뻔한 습지
환경운동가와 시민들의 저항으로 보존
도시 숲의 역할 톡톡히 하며 삶속으로
기적과 같은 다행에 가슴이 뭉클해져
[고양신문]
습지의 봄으로 나간 아이들, 마냥 즐거워라
벚꽃이 흐드러질 때까지 침묵하고 있던 느티나무가 삐죽이 여린 잎을 내밀 무렵, 봄이 어디까지 왔나 살피러 아이들과 함께 다시 습지로 나왔습니다. 코로나19 관련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 상향으로 겨우내 집안에 갇혀 있었을 아이들이 안쓰러워 처음 습지로 데리고 나왔을 때, 아이들의 모습은 놀라움 자체였습니다. 달라진 바람을 가르며 생태보존습지원 사이로 난 둑길을 왔다 갔다 줄지어 걷기만 했는데도 마냥 즐거워하는 게 아닙니까? 생각해보니 올해 만난 아이들은 작년에 입학하고 채 40일도 등교하지 못했지요. 생태 수업 역시 학교에서 제작한 온라인학습 영상과 생태 재료를 활용한 실내 수업으로 진행하였으니, 친구들과 함께 습지의 봄을 맛본 그 순간이 사실 아이들에게는 첫 경험이었던 겁니다.
포장된 공원길을 벗어나 언덕을 밟은 아이들은 알려주지 않아도 발바닥에 닿는 흙길의 촉감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폭신폭신해서 좋아요. 마음이 편안해져요. 습지는 와봤는데 이 안쪽으론 처음 걸어봐요.” “이 길로 가면 고봉산 가는 길과 만나지. 우리 저기 보이는 삐약이 놀이터에서 놀다가 다시 저 위까지 걸어가 볼까?” “네.” 대답하는 소리가 우렁찹니다. 흙길 언덕엔 숲속 교실이 있고 조금 더 들어가면 ‘삐약이 체험숲’이라는 놀이터가 있는데, 저들과 동급으로 여길까 싶어 아이들에게는 숨겼지만 사실 습지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다른 점이라면 아이들이 줄에 매달리고, 나무를 오르는 놀이터 시설에 집중하는 동안 저는 놀이터를 에워싼 숲이 선사하는 아늑함에 빠지곤 합니다.
도시 한복판에서 만나는 넓고 아늑한 숲
부러 시간을 내어 높은 산을 오르지 않아도 학교에서 몇 발짝만 걸어 나오면 자연 숲에 머무를 수 있다니요. 그것도 인구 100만이 넘는 도시 한복판에서 말입니다. 이곳은 동화 나라 한 페이지에 펼쳐진 숲속 마을의 배경지로 마치 숲속 동물들이 모여 마을 회의를 하는 장소처럼 넓고 아늑합니다. 우리 반 아이가 만들었다는 비밀 아지트도 아마 이 부근 어디쯤일 겁니다. 아이들은 저들끼리 놀이를 만들고, 이내 숲에 몸을 맡깁니다. 매달린 줄에서 떨어져 무릎이 까지지는 않을까, 나뭇가지에 찔려 상처가 나지는 않을까 걱정되지만 환하게 웃는 아이들 표정이 마스크 밖으로까지 줄줄 새어 나와 데리고 나온 저도 신이 납니다.
의정부에 살던 제가 안곡 습지를 알게 된 것은 습지가 포함된 일산2지구 택지개발지구에 아파트를 분양받은 2004년 무렵으로 기억합니다. 아파트 분양자료집에서 살펴본 택지개발지구 도면에는 습지 일대가 주택단지로 조성될 예정이었습니다. 이후 습지를 보전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선 환경 단체와 고양 시민들의 환경 운동 기사를 심심찮게 접하게 되었는데, 결국 습지는 2006년 가을 무렵 생태 공원의 형태로 보전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공사 측과 고양시가 260억 가량 예산을 투입했다고 환경 운동에 참여하신 분께 들었습니다.
예정된 택지개발지구라 습지의 나무들이 일제히 그러했듯 70년간 습지를 지켜온 목련 나무도 순식간에 벌목되었지요. 습지 보전을 희망하던 시민들은 베어진 목련 나무로 고봉산 희망 솟대를 만들었습니다. 고봉산과 습지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우뚝 선 나무 솟대를 구경하러, 고봉산에 오르는 초입 관문으로, 밀어버린 땅에 다시 풀이 돋고 인공이 가미되지 않은 당시의 풍경이 좋아서 그냥 습지에 들르기도 했는데, 그때 고봉산에서 자작자작 내려와 습지로 흐르던 맑은 물길 풍경은 이제 추억이 되었습니다. 목련 나무 솟대가 있던 그 자리에는 현재 소명을 다하고 2008년에 철거된 희망 솟대를 기억해달라는 안내판만 남아있습니다.
습지로 통하는 학교 쪽문 열면 저절로 탄성
오늘은 혼자 습지를 산책합니다. 휴일이니까요. 마지막으로 산책한 게 열흘 전쯤, 그새 봄비가 충분히 내려주어서일까요? 이제 5월의 습지는 완연한 연둣빛으로 탱글탱글합니다. 시골 마을 어귀에서 봄직한 평상에 앉아 올려다보는 느티나무 잎은 이제 꼬맹이들의 손바닥만큼 자라있네요. 학교는 이 느티나무가 자리잡은 ‘생태학습원’과 갈대가 무성한 ‘생태보존습지원’에 맞닿아 있습니다. 학교 담장에는 습지로 통하는 쪽문이 있는데. 자물쇠가 채워진 철제 담장 너머를 힐끗거리는 아이들은 드르륵 문이 열리는 순간 저도 모르게 가볍게 탄성을 지르곤 합니다. 마치 굳게 닫혀 있던 비밀의 화원이 삐그덕 열리는 현장을 최초로 목격한 사람처럼 말입니다. 조심스레 쪽문을 넘어 한 발짝 들어서면 우람한 뚝버드나무와 습지보존원의 갈대 무리가 먼저 우리를 반겨줍니다. 슬픈 사연이 서려 있을 것만 같은 명자나무 붉은 꽃과 하얀 횃불이 이글거리듯 피어난 긴꼬리조팝꽃으로 가득했던 습지 내 산책로는 이제 이팝나무의 하얀 꽃무더기가, 공원가로는 줄지어 늘어선 세로티나 벚나무들의 길다란 흰꽃송이가 한창입니다. 드문드문 풍기는 아카시 꽃향기도 놓칠 수가 없군요.
안곡습지를 가득 채우는 새들의 소리
습지는 고요합니다. 연둣빛 사이로 듬성듬성 사람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지만 고요한 이곳을 가득 채우는 소리의 주인은 사람이 아닙니다. ‘새 관찰 학습원’에 서서, 앞쪽으로 펼쳐진 숲을 향해 귀를 기울이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다양한 새소리가 들립니다. 마치 들을 준비를 마친 사람에게만 귀한 음악을 선보이는 조류 교향악단의 초호화 연주곡을 감상하는 기분이랄까요? 고양시의 유명한 탐조활동가이자 초등교사인 김석민 선생님께서 몇 년간 안곡 습지를 조사해보니 170여종의 새를 관찰했다는 인터뷰 기사가 떠오르네요. 습지의 새들은 학교를 자주 넘나듭니다. 습지와 가장 가까운 장소인 과학실에는 직박구리가 자주 다녀간다는데, 인간의 무리로 가득한 아파트 숲에서 어쩔 수 없이 밀려난 새들이 쉬어가는 습지 덕분에, 어쩌면 저는 고양시에서 새소리가 가장 흔한 근무지에서 하루를 보내는 행운을 얼떨결에 얻은 건지도 모릅니다. 학교로 전근 온 뒤로 찌들었던 몸과 마음이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안골이라 불리던 우리 마을의 습지와 숲 덕분입니다.
느리고 고요하고, 역동적인 숲이 삶으로 ‘푹’
‘나 서른다섯이 될 때까지 애기똥풀 모르고 살았지요’라는 문장은 안도현 시인의 시 ‘애기똥풀’의 첫 구절인데, 바로 제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대도시에서 자란 저는 시집을 통해 들꽃을 배웠습니다. 안도현과 최두석 시인의 시집을 읽고서야 명자나무와 투구꽃을 구해 화분에 가두어 키워보았고, 김선우와 김해화 시인의 시집을 읽고서야 비로소 길가에는 앙증맞은 꽃마리와 꽃다지꽃이 수없이 피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디 아이들은 저처럼 글로 먼저 자연을 배우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벼농사 재배를 하지 않는 ‘묵논학습원’에서 3년간 올챙이알을 채집하여 아이들과 함께 개구리가 되는 한살이 과정을 지켜보기도 했고, 사람들이 집에만 머물던 작년엔 습지 사이로 난 둑길에서 길을 잃은 새끼 고라니와 눈이 마주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올해 유독 새롭게 보이는 것은 ‘생태보존습지원’에 공존하는 죽음과 삶의 형상입니다. 봄이 되면 이내 사라질 줄 알았던 부들과 갈대의 잔재는 푸르른 오월에도 수북이, 아직도 키를 꼿꼿이 세운 채 버티고 있습니다. 사명을 다하고 말라버린 꽃차례와 빛바랜 줄기를 배경으로 갈대와 부들의 어린싹들은 물 위로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중입니다. 잔재는 여름이 되기 전에 쓰러지고, 서서히 습지 생명이 살아갈 양분으로 탈바꿈하겠지요. 느리고 고요한, 그러나 한없이 역동적인 이 풍경은 지금 느닷없이 제 삶으로 들어와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중입니다. 자연은 절대로 한 번에 많은 걸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자연의 질서는 규칙을 향해 변함없이 반복되어도, 같은 곳을 수없이 산책해도 제게는 늘 새롭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이 사실을 적어도 저보다는 일찍 깨닫게 되면 좋겠습니다.
이상 기후 현상과 탄소 저감 운동이 중요한 환경 문제로 떠오른 지금, 15년 전 아스팔트 포장도로와 빽빽한 콘크리트 건물로 가득 찰 뻔한 안곡 습지가 시민의 손길로 무사히 보전되고, 지금까지 자연 생태계를 유지하며 마을의 기온을 낮추고, 마을의 공기를 정화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기적과도 같은 다행스러움에 괜시리 뭉클해집니다. 안골의 습지와 숲에서 자연과 함께 성장한 아이들은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도시 속에 공존하는 숲과 습지의 가치를 서서히 깨닫게 될 테지요. 그러니 아이들과 또 습지에 나와야겠지요? 다음에는 둑길에 솟아오른 부들잎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만져보자고 할 겁니다. 물론 그때의 아이들은 습지의 곤충들에 정신이 팔려 제 말은 들리지도 않을 테지만요.
권덕은 건강넷 / 안곡초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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