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넷·고양신문 공동진행 건강도시 심층기획➑ ‘어떻게 나이들어야 할까’
10분이면 한바퀴, 돌다보면 엉클어진 생각이 정리되고
고단한 일상 위로하는 내곁의 다정한 숲 ‘성저공원’
매일매일 찾을 수 있는 가까운 치유 숲
마을숲 산책❷ 성저공원
맹모는 ‘삼천지교’ 임모는 ‘무천지교’
나는 일산 후곡마을에 산다. 일산 신도시가 개발될 때 운 좋게 분양을 받아서 1994년에 입주했다. 그 후로 한 번도 이사를 안 가고 같은 곳에서 살았으니 이곳에 산 지 27년이 된다. 1996년에 이곳에서 태어난 아이는 일산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마치고 이제 대학생이 되었다.
아이가 중학생쯤 되었을 무렵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엄마, 우리는 한 번도 이사를 안가서 너무 좋아. 한 곳에서 오래 사니까 엘리베이터를 타면 동네 아줌마들이 많이 컸다고 인사도 해 주고, 친구들도 다 가까이 있어서 내가 정서가 안정되게 큰 거 같아. 맹자 어머니는 맹자를 잘 키우기 위해 세 번 이사를 했는데, 엄마는 한 번도 이사를 안 가서 나를 잘 키운 거 같아. 맹자 어머니가 ‘맹모 삼천지교’를 했다면, 엄마는 ‘임모 무천지교’를 했어. 하하.” (우리 아이 성씨가 임씨이다.)
아~, 이런 기특한 말을 하다니! 나는 직장을 다니느라 바빠서 주변의 이웃들과 사귀지도 못했고, 아이에게 못 해줘서 항상 미안한 마음을 품고 살았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는 더 많은 지식과 정보, 더 많은 자극을 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해 주는 것도 좋은 교육이 될 수 있다니! 이런 통쾌한 반전이 있나? 이렇게 ‘임모 무천지교’를 실천하며 한 번도 이사를 안 가고 27년간 살았던 집 바로 길 하나 건너편에 성저공원이 있다.
더워서 가고, 눈 내려서 가고, 수없이 오가다
성저공원은 일산 성저마을과 후곡마을 사이에 있는 작은 공원이다. 동네 뒷산만큼도 안 되는 야트막한 언덕이고, 한 바퀴 돌아도 10분도 채 안 되는 자그마한 숲이다. 그래도 벤치에 앉아 숲을 바라보면 그곳에서 긴 세월 자리를 지켰을 키 큰 고목들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있어서 아주 오래된 숲에 온 느낌이 든다.
나는 27년간 살면서 이곳을 수도 없이 많이 찾았다. 여름에는 더워서 갔고, 겨울에는 눈이 내려서 갔다. 글을 써야 하는데 생각이 엉클어져 정리가 안 될 때는 성저공원을 두 바퀴쯤 돌면 생각이 말끔히 정리되고, 그러면 잊어버리기 전에 얼른 집에 돌아와 서둘러 글을 쓰곤 했다. 이렇게 성저공원은 내 곁에서 나를 지켜준 치유와 사색의 숲이었다.
이런 성저공원을 산책이나 운동이 아닌 나만의 다른 용도로 사용했던 적도 있었다. 2017년에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허허로움이 몰려와, 뭔가에 꽂혀 아무 생각 없이 몰두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다. 그때 시작한 것이 오카리나였다. 그해 겨울에 대화역을 지나는데 우연히 오카리나 동호회 몇 분이 자그마한 발표회를 하는 걸 보게 됐다. 프로도 아닌 아마추어들이 소박하게 버스킹을 하는 모습이 신선하게 느껴져서 다가가서 물었다. ‘오카리나를 가르쳐 주는 분이 있으신가요? 혹시 연락처를 받을 수 있을까요?’ 해서 명함 한 장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만나게 된 분이 고양시에서 오카리나 연주도 많이 하시고, 명지병원에서 열린 음악회도 하시는 파랑새 오카리나 단장 유은경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초보인 나에게 ‘도레미파~’ 운지부터 가르쳐 주고, ‘섬 집 아이, 과수원 길, 보리밭’ 같은 동요부터 연습하게 하셨다. 그렇게 두어 달이 지날 무렵 선생님은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들을 다 모아 발표회를 하게 됐다며 나에게도 오연준의 ‘고향의 봄’을 연주하라고 곡을 지정해 주셨다. 그래서 매일 연습을 하게 됐는데, 일요일이 되면 연습할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그때 일요일에 식구들 밥을 차려주고 악보를 챙겨 찾아간 곳이 성저공원이었다.
하얀 꽃잎 눈송이처럼 날리는 아카시아 숲
성저공원 한가운데 운동기구가 있는 아래쪽에 지붕이 있는 평상이 있었다. 그곳이 나의 연습 공간이었다. 그때가 5월에서 6월로 넘어가는 시기였는데 눈앞에 아카시아 꽃이 활짝 피어 있고, 하얀 꽃송이가 땅에 떨어져서 사방이 눈 내린 설원처럼 하얗게 보였다. 오카리나로 ‘과수원 길’을 불었다. ‘동구 밖 과수원 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하얀 꽃 이파리 눈송이처럼 날리네~. 향긋한 꽃냄새가 실바람 타고 솔솔~’ 아카시아 꽃냄새가 코끝을 간질이며 지나가고, 나는 머나먼 동구 밖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둘이서 말이 없네. 얼굴 마주 보며 생긋~’ ‘무슨 동요가 가사가 이래. 이건 썸타는 청춘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아닌가. 과수원 길이 어린 애들이 부르는 동요 맞나, 큭큭’하며 과수원 길을 연주했던 기억이 난다.
평상에서 오카리나 연습을 하고 있으면, 산책하다가 ‘어디서 새소리 비슷한 소리가 나서 무슨 소리인가 했다’며 찾아와서 말을 붙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게 무슨 악기냐, 배운 지 얼마나 됐냐, 누구에게 배우냐, 나도 하모니카를 배운 적이 있다…’ 주로 그런 이야기였다. 악기에 관심이 있고, 악기를 한두 번 배워본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언젠가는 ‘All of me’라는 팝송을 불고 있는데 한 남자분이 와서 말을 붙였다. 본인도 색소폰을 배워서 발표대회에 나가 인기상을 받았던 적이 있노라며 사진과 동영상을 보여줬다. 그러면서 색소폰 발표회에 나가면 ‘왜 이렇게 사람들이 안동역을 부르는지 모르겠다’며 투덜댔다. 본인은 ‘My way’인가 하는 팝송을 연주했다고 했다. 나는 ‘트롯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안동역도 나름 명곡인데⋯’생각하며 이 분은 나름대로 자신의 음악적 취향과 주관이 있구나 했다.
그 후에도 몇 번인가 색소폰을 배운 적 있다는 분의 방문을 받았다. 그분들의 연주 사진을 보면 모두들 하나같이 선글라스를 쓰고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공원을 마당 삼은 ‘행복이 가득한 집’
성저공원에서 대화도서관으로 가는 길 건너편에 분식집과 커피집이 있고, 3층짜리 단독주택도 많이 있었다. 언젠가 나는 거기 있는 집을 보며, ‘아, 여기 사는 사람들은 참 좋겠다. 집을 나서면 바로 도서관이 있고 공원이 있으니까, 공원 전체가 내 집 마당인 셈이네’하며 부러운 생각을 했었다. 그때 그 집 현관문이 열리며 젊은 아빠가 어린 아들 손을 정겹게 잡고 성저공원에 세발 자전거를 타러가고 있었다.
너무 보기 좋은 광경에 빙그레 웃으며 그 집을 보니 집 앞에 벽돌로 쌓은 작은 화단을 가꾸고 있었다. 쌈 채소도 몇 가지 심어 놓고 꽃 몇 송이도 한쪽에 심어 놨는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금낭화가 조르르 피어 있었다. 금낭화는 분홍색 꽃인데 여학생이 갈래머리를 묶은 듯한 독특한 모양으로 조르르 매달려 있는 정말 예쁜 꽃이다. ‘어머, 이 집 봐라. 화단도 정말 아기자기하게 가꾸어 놨네’하며 집을 쳐다보니 독특한 문패가 걸려 있었다.
‘since 1972. 행복이 가득한 집. 조○○ ♡ 김○○’ ‘since 2003. 사랑이 가득한 집. 조○○ ♡ 정○○’이라고 적혀 있었다. 가만히 보니 1층은 주방이고, 2층과 3층에 노부부와 아들 부부, 손자 3대가 살고 있는 집인 것 같았다. 이렇게 나는 성저공원 맞은편에 있는 ‘행복이 가득한 집’을 알게 됐다. 그 후에 남편과 도서관에 갔다 오는 길에 이 집 이야기를 했더니, 남편은 인문학 모임 글쓰기반 수업에서 이 집을 소재로 시를 한 편 쓰기도 했다.
대화도서관 창가에서 바라보는 깊은 숲
내 집에서 27년간 살면서 좋았던 점 또 하나는 성저공원 옆에 대화도서관이 있다는 것이었다. 대화도서관은 아마도 전국에 있는 도서관 중에서 가장 멋진 전망을 가진 도서관이 아닐까 싶다. 3층 종합자료실 서가 안쪽으로 들어가면 통유리로 된 창가를 따라 긴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다.
책을 몇 권 골라 이 자리에 앉으면 성저공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성저공원 나무들은 키가 너무 커서 공원을 산책할 때 눈에 잘 들어오지 않고 오솔길만 보게 된다. 그런데 이곳은 3층이라 공원의 나무들이 한눈에 조망된다. 요즘 같이 벚꽃이 한창 피어나는 계절에는 손을 뻗으면 잡힐 듯이 바로 눈앞에 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이곳에 앉아 책을 펴 놓고 책 한 줄 읽고 공원 한번 바라보고 하면 아주 깊은 숲속 캠핑장에 와 있는 느낌이 든다.
한때 캠핑 열풍이 불어 닥친 적이 있었다. 우리 집도 아이가 어렸을 때 캠핑용품을 바리바리 싸들고 차 막혀가며 캠핑장을 간 적이 많이 있었다. 캠핑을 할 때 하이라이트는 숯불을 피워 고기를 구워 먹고, 릴렉스체어라는 멋진 이름을 가진 의자에 앉아 책 펴놓고 새소리와 물소리를 들으며 책 한 줄 읽고 숲 한번 쳐다보고, 책 한 줄 읽고 계곡 한번 바라볼 때가 아닐까 싶다.
시간은 없고 멀리 캠핑을 갈 여유도 없는 사람은 지금이라도 대화도서관 3층 종합자료실 창가를 찾아가 보자. 그곳에 우리의 정신을 고양시켜 줄 많은 책들이 있고, 성저공원의 푸르른 숲이 눈앞에 펼쳐져 있으니, 고단한 일상을 벗어나 자연 속으로 순간 이동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강영임 건강넷·국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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