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꽃. 꽃잎이 다섯 갈래로 갈라지지만 통꽃이다. <사진=김윤용>



[고양신문] 1966년 이른 봄, 젊은 신영복은 서울대 문학동아리 후배들 초청을 받아 서오릉으로 답청(踏靑)을 갑니다. 서울 불광동 버스 종점에서 1시간 걸리는 서오릉까지 삼삼오오 얘기하며 걷습니다. 소달구지 바퀴 자국이 두 줄로 패인 황토길을 걷습니다. 대학생들과 어울려 걷다가 여섯 명 꼬마아이들을 만납니다. 서울 문화동 달동네에 사는 가난에 찌든 아이들입니다. 냄비까지 챙겨 큰맘 먹고 봄 소풍을 나온 꼬마아이들과 말문을 트고 가까워진 신영복은 서오릉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합니다.

서오릉에 도착한 신영복과 대학생 일행은 잔디밭에 둘러앉아 점심을 먹습니다. 그러다 신영복을 만만하게 본 한 대학생과 씨름을 합니다. 덩치만 큰 그 대학생을 두 번이나 들배지기로 보기 좋게 넘어뜨립니다. 신영복 응원단인 문화동 꼬마아이들은 저 멀리 능 옆에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과자와 과일 따위를 슬그머니 챙긴 신영복은 대학생들을 떠나 꼬마아이들과 다시 어울립니다. 씨름도 하고 과일과 과자도 나눠먹으며 신나게 놉니다. 한참 동안 논 뒤 아이들과 헤어집니다.

대학 후배들과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저 멀리 소나무 아래에서 아이들이 서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집에 갈 채비를 한 아이들이 신영복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기회를 찾는 것 같았습니다. 꼬마아이들에게 뛰어갑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한 묶음 진달래꽃을 선물 받습니다. ‘나의 기억 속에서 가장 밝은 진달래 꽃빛’ 추억과 잔디밭 진달래 향기 속에서 그렇게 꼬마아이들과 인연을 이룹니다. 중학생 모자를 쓴 조대식 군과 신영복은 주소를 서로 주고받았습니다.

신영복은 ‘문화동 산 17번지’ 꼬마아이들과 함께 어울렸던 서오릉 답청을 까맣게 잊습니다. 15일쯤 뒤 아이들에게서 짤막한 편지가 숙명여대 교수실에 도착합니다. 아이들과 장충체육관에서 만나고 ‘청구회’로 모임 이름을 정한 뒤 1968년 1월까지 이어갑니다. 그리고 신영복은 구속되고 맙니다. 중앙정보부에서 심문을 받을 때, 순수한 아이들과의 추억인 ‘청구회’ 정체를 추궁 받았을 때 느꼈을 곤혹감. ‘겨울에도 푸르른 소나무처럼 / 우리는 주먹 쥐고 힘차게 자란다’로 시작하는 청구회 노래는 ‘국가변란을 노린 폭력과 파괴’로 추궁 당합니다. 『청구회 추억』은 1969년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사형수로 지낼 때 쓴 글입니다.

신영복의 '청구회 추억'을 담은 그림책. <사진=김윤용>


신영복 선생에게 ‘가장 밝은 꽃빛’ 추억으로 남은 산동네 아이들과 진달래. 진달래꽃은 먹을 수 있어서 참꽃으로 부릅니다. 쌀가루 반죽 위에 진달래 연보라 꽃을 올려서 전을 부쳐 먹습니다. 바로 화전(花煎)입니다. 진달래는 북한 나라꽃으로 잘못 알려져 있습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북한 나라꽃은 함박꽃으로 바뀌었습니다. 척박한 산성 땅에서도 잘 자라는 진달래는 3~4월 잎이 나기 전에 연보라색 꽃이 핍니다. 꽃잎이 다섯 갈래로 갈라지지만 통꽃입니다. 잎은 어긋나게 달리고 긴 타원형입니다. 산성 땅에서 잘 자라는 진달래가 많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나라 산들이 비옥해진 까닭입니다.

김윤용 『호수공원 나무 산책』 저자

지난 1월 15일은 신영복 선생 타계 2주기였습니다. 더불어숲, 처음처럼, 여럿이함께 등의 서화와 함께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등 사상에 이르기까지 신영복 선생은 우리에게 수많은 유무형 유산을 남겼습니다. 빨리 봄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청구회 추억』을 추억’하기 위해 서오릉에 들르고 싶습니다.

 

 

<사진=김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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