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종 기자의 하루여행] 고양누리길⑨ 고봉누리길(하)

홀로 높이 솟은, 일산 대표하는 상징경관 
시민들의 노력으로 지켜낸 안곡습지공원
새들·나무들과 함께 걷는 아기자기한 숲길

자연의 평화와 대비되는 한국전쟁의 상흔
잠시 쉬어가라 다독이는 영천사의 호젓함

[고양신문] 일산은 이름부터가 ‘산 하나(一山)’다. 그 산이 바로 고봉산(高峰山)이다. 높이는 208m에 불과하지만 주변 어디에서나 고봉산의 우뚝한 경관이 눈에 잘 들어오기 때문에 일산동·서구를 대표하는 상징경관이다. 고봉(高峰)이라는 이름은 이 땅을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을 때부터 사용됐다. 오늘날 고양(高陽)이라는 이름 역시 ‘고봉’과 ‘덕양’이 합쳐진 말이니 이름의 역사가 무척 깊다. 

고봉산의 우리말 이름은 인근 초등학교와 도서관의 이름으로 남아있는 ‘한뫼’다. 고봉과 일산과 한뫼, 하나같이 ‘우리 동네 하나밖에 없는 우뚝한 산’이라는 뜻이니, 이 산을 바라보는 일산 사람들의 자부심을 짐작하고도 남겠다.

황룡산을 돌아본 지난주에 이어 고양누리길 9코스 나머지 구간인 고봉산을 한바퀴 돌아보자. 안곡습지공원을 출발해 ▶고봉산삼거리 ▶영천사 ▶장사바위 ▶진밭마을 ▶수연약수터 ▶만경사를 차례로 들러 원점으로 돌아오는 약 6㎞ 순환코스다.  

아기자기한 도심 생태 쉼터 

고봉산 나들이의 출발점은 안곡습지공원이다. 고봉산의 품에 아늑하게 안겨 있는 안곡습지공원은 원래 도시의 팽창으로 택지개발이 계획됐던 곳인데, 시민들의 오랜 노력으로 개발을 막아내고 도심 생태 보고를 지켜낸 곳이다. 과거 논자락과 웅덩이가 있었던 고봉산 남서쪽 기슭 용출습지인 안곡습지는 오늘날 인근 주민들의 쉼터로, 특히 아이들이 생명의 소중함을 체험하는 생태공원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공원에는 생태학습원, 묵논습지, 생태미로, 야생초화원, 삐약이체험숲 등이 아기자기하게 꾸며졌다. 묵논습지에는 봄에 인근 학교 학생들이 모내기를 한 벼가 누렇게 익어 고개를 숙이고 있고, 무성한 갈대밭 사이로 새소리가 재잘재잘 들려온다.

안곡습지공원 갈대밭과 아파트단지가 어우러진 모습.
안곡습지공원 갈대밭과 아파트단지가 어우러진 모습.

수십 종 산새들의 보금자리 

안곡습지공원에서 고봉산 오르막길로 들어선다. 인근 주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숲길답게 곳곳에 계단과 의자, 평상과 같은 휴식공간이 잘 마련돼 있고, 운동시설도 다채롭게 갖춰져 있다. 산책로 곳곳마다 일산동구보건소에서 내건 건강을 독려하는 문구들이 고봉산을 찾은 이들의 발걸음을 응원한다.  

고봉산 숲길을 오를 때는 항상 귀를 쫑긋 세우고 발걸음을 떼어야 한다. 다양한 새소리가 들려오기 때문이다. 직박구리, 붉은머리오목눈이, 곤줄박이, 박새, 오색딱다구리와 같이 비교적 개체수가 많은 새들은 물론, 소쩍새, 솔부엉이, 새매와 같은 맹금류들도 고봉산에 기대어 살아간다. 고봉산처럼 평야와 도심에 둘러싸인 숲은 깊은 산속보다 단위면적당 새들의 밀도가 오히려 높다고 한다. 주변에서 먹이활동을 하는 새들이 모두 한정된 숲으로 모여들기 때문이란다. 

안곡습지공원과 고봉산 숲은 다양한 새들의 보금자리다.
안곡습지공원과 고봉산 숲은 다양한 새들의 보금자리다.

구슬아씨와 안장왕의 러브스토리

은은한 가을꽃이 피어있는 벤치 쉼터에서 부드러운 흙길이 끝나고 가파르게 이어진 계단길이 시작된다. 한동안 이어진 오르막으로 적당히 숨이 차오를 때쯤 다시 완만한 능선을 만나고 ‘한구슬과 안장왕 이야기’가 그림과 함께 담긴 스토리보드가 나타난다. 고구려의 안장왕이 태자이던 시절, 당시 백제땅이었던 고봉산 기슭을 염탐하러 왔다가 한주(漢珠)라는 아리따운 아가씨와 사랑에 빠져 우여곡절을 겪지만 서로에 대한 사랑을 지키며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는 이야기다.

낭만적인 러브스토리지만, 이야기의 배경에는 먼 옛날 고구려와 백제가 한강 하구를 차지하기 위해 한치의 양보 없는 영토 전쟁을 벌였던 역사가 깔려 있다. 특히 이야기의 구조가 춘향전과 무척 닮아 많은 연구자들이 춘향전의 원전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한주 아가씨가 안장왕을 맞이하기 위해 봉화를 올렸다 해서 산 이름을 고봉(高烽)산으로 표기한 문헌도 있다.  

안장왕과 구슬아가씨의 이야기를 적어놓은 스토리보드.
안장왕과 구슬아가씨의 이야기를 적어놓은 스토리보드.

한국전쟁이 남긴 아픈 역사  

삼국시대 초기부터 시작된 전쟁의 아픔은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도 재현됐다. 한구슬 스토리보드에서 멀지 않은 곳에 ‘평화의 광장’이 조성돼 있는데, 다름 아닌 고봉산 일대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6·25전쟁의 상흔을 기억하는 장소다. 이곳에 설치된 여러 개의 스토리보드에는 지역의 주요 전투, 6·25전쟁의 참상과 피해, 그리고 최근 진행된 6·25 전사자 유해발굴의 성과가 생생한 사진자료와 함께 기록돼 있다.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아픈 역사가 숲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생명의 기운과 대비되어 더욱 선명한 비극으로 다가온다.    

평화의 쉼터에서 만나는 전시 보드. 
평화의 쉼터에서 만나는 전시 보드. 

최고의 전망포인트 영천사 

길은 삼거리에서 고봉산 순환로와 만난다. 왼쪽은 영천사, 오른쪽은 만경사가 나오는데, 정상을 대신하는 장사바위를 들르기 위해 영천사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영천사까지는 차가 다니는 넓은 길이 이어지고 중간에 이무기바위와 붙임바위 안내판이 나타나는데, 규모나 모양이 그저 소박하다.

영천사는 고봉산에서 가장 탁월한 전망 포인트다. 사찰 아래쪽 남서쪽 경사면을 탁 터놓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멀리 송포평야가 조망됐는데, 지금은 탄현의 랜드마크인 두산 위브더제니스 타워가 판타지 게임에 등장하는 거대한 탑처럼 시야를 압도한다. 
영천사는 구석구석이 늘 정갈하게 정돈돼 있다. 경내에 걸린 문구 한 구절이 마음을 차분하게 다독인다. ‘나그네여, 이제 쉬어가라 인생은 한토막 꿈이로다’

많은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영천사
많은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영천사
영천사에서 바라본 중산과 탄현 전망.
영천사에서 바라본 중산과 탄현 전망.

장사바위 쉼터와 고봉산성  

고양누리길 코스는 고봉산 순환로로 이어지지만, 잠시 장사바위에 올라갔다 오지 않으면 섭섭하다. 앞서 말했듯 고봉산 정상은 군사시설이 차지하고 있어서 현재로서는 장사바위가 고봉산 정상 노릇을 한다. 고봉산에 유일하게 거대한 바윗돌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장사바위 부근이다. 심학산 장사와 고봉산 장사가 공기놀이 하듯 바윗돌을 던지며 놀았다는 전설이 전해내려온다. 두 개로 갈라진 듯한 커다란 바위 표면에는 돌을 갈아 구멍을 낸 자국들이 여럿 발견돼 다채로운 상상력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먼 옛날에는 장사바위 위로 고봉산성이 있었다 한다. 한강하구 평야지대에 우뚝 솟은 산이었으니, 당연히 고대부터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했던 것이다. 둘레가 400m 정도였다는 고봉산성은 덕양산의 삼국시대 석성처럼 봉우리를 둘러싼 테뫼식 산성인데, 지금은 군부대 울타리가 가로막고 있어 희미한 흔적이나마 찾아볼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군사시설로 가로막힌 고봉산 정상부를 대신해 고봉산 정상 역할을 하는 장사바위.
군사시설로 가로막힌 고봉산 정상부를 대신해 고봉산 정상 역할을 하는 장사바위.

산꼭대기를 차지한 고봉산 철탑

오늘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고봉산의 이미지는 정상부에 높이 솟은 철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멀리서 보면 철탑의 높이가 거의 산의 고도와 맞먹을 정도다. 그래서 북한산 백운대에 올라서도 뾰족한 철탑만 찾으면 고봉산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아시다시피 고봉산 철탑은 군사시설이다. 탄현 황룡산, 벽제 개명산과 함께 접경지역에 자리한 묵직한 운명을 산머리에 얹고 있는 셈이다. 일부 시민들은 고봉산 철탑이 과연 오늘날에도 군사적으로 필수적 기능을 수행하는지 물음표를 붙이면서, 분단과 대결의 시대를 상징하는 고봉산 철탑을 이제는 철거하자고 요구하기도 한다. 일산의 주산(主山)인 고봉산의 정상을 시민들이 돌려받을 때가 됐다는 요청이다. 

안곡습지에서 올려다 본 고봉산 철탑.
안곡습지에서 올려다 본 고봉산 철탑.

반면 군사적 목적을 떠나서도 고봉산 꼭대기의 철탑이 경관적으로 딱히 거슬리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오랫동안 보아온 익숙한 풍경이라 철탑이 없어지면 오히려 허전할 것 같다는 것이다. 이들은 아예 고봉산 군사시설이 개방되면 고봉산 철탑에 나선형 사다리를 설치해 ‘일산의 에펠탑’으로 관광명소화 할 수도 있지 않겠냐며 상상의 나래를 펴기도 한다.  

정겨운 풍물가락 전해오는 진밭마을 

다시 순환로로 내려와 시계방향으로 산을 돌아가면 진밭마을이 나온다. 한자이름 투성이인 이정표에 순우리말 지명이 등장하니 친근하게 느껴진다. 고봉산 뒷자락 자연마을인 진밭에는 기미년 만세운동 이후 깃발 꼭대기에 태극기를 꽂고 풍물을 친다는 진밭두레패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산기슭 안쪽으로는 흔치 않은 성인 함종어씨 양숙공파(咸從魚氏 襄肅公派) 문중묘가 넓게 자리를 잡고 있다. 

옛모습이 남아있던 진밭마을도 주택과 창고들이 하나둘 늘어나며 조금씩 풍경이 변하고 있다. 시야를 멀리 바라보니 견달산 너머로 고양누리길의 상징인 북한산의 삼각봉우리가 반가운 얼굴을 내민다. 

진밭마을에서 조망되는 식사동 위시티 아파트단지. 
진밭마을에서 조망되는 식사동 위시티 아파트단지. 

수연약수터·만경사 거쳐 원점으로

길은 다시 숲으로 들어서 떡갈나무, 층층나무, 물푸레나무, 굴참나무 등이 군락을 이루는 오솔길을 오르내리다가 수연약수터에 닿는다. 고양시에는 상하수도사업소에서 정기적으로 수질검사를 하는 지정약수터가 16곳 있는데, 수연약수터도 그중 하나다. 아쉽게도 수량이 많지 않은 수연약수터는 계절에 따라 음용수 적합과 부적합을 오락가락한다. 약수터 주변 넓은 공터에는 피크닉테이블 등이 놓여있어 산속의 아늑한 쉼터를 제공한다. 

수연약수터 주변의 넓은 쉼터.
수연약수터 주변의 넓은 쉼터.

수연약수터에서 조금만 가면 큰길이 나오고, 고봉산의 유서 깊은 사찰 만경사가 나타난다. 만경사 앞에는 키가 큰 느티나무 고목이 세월을 굽어보고 있고, 절 마당의 백구는 절집 개 삼 년에 득도라도 한 표정으로 한껏 여유를 부리고 있다. 

계단길을 되밟아 내려와 출발점인 안곡습지공원으로 돌아왔다. 산길을 걸을 때는 목덜미에 땀이 찼었는데, 해가 기우니 기온이 급격히 떨어진다. 반나절 동안 고봉산의 청량한 기운을 가슴에 채웠으니, 성석로 주변 식당 한 곳을 골라 따듯한 국물로 속도 채워야겠다.  

❚고봉누리길(하) 고봉산 걷기 정보 
- 코스 길이 : 6㎞
- 소요 시간 : 2시간30분~3시간
- 출발점 및 도착점 : 안곡습지공원 
- 경관·휴식 포인트 : 안곡습지공원, 영천사 전망, 장사바위, 수연약수터, 만경사 느티나무
- 화장실 : 2곳(안곡습지공원, 영천사) 
- 뒤풀이 맛집 : 성석로 주변 식당, 중산마을 먹자골목 

일산동구보건소에서 고봉산둘레길 곳곳에 내건 건강 응원 문구.
일산동구보건소에서 고봉산둘레길 곳곳에 내건 건강 응원 문구.
고봉누리길에서 만난 소담한 들꽃.
고봉누리길에서 만난 소담한 들꽃.
영천사 전경.
영천사 전경.
송포들녘에서 조망되는 고봉산.
송포들녘에서 조망되는 고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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